갑자기 닥친 락다운으로 가게들은 문을 닫고, 학교도 쉬고, 슈퍼마켓이나 주유소 같은 필수 업종들만 영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집에 한 명씩만 시장을 보라고 하고, 같이 사는 사람들 말고는 대화도 하지 말라는 그런 시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얼마나 사회적인 관계 속에 살고 있었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 고립된 긴 시간 동안 밥해 먹는 거 말고, TV 보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거 말고 할 일을 찾는 게 너무 절실했어요. 그래서 뜨개질을 시작합니다. 온 집을 뒤져 자투리 털실을 모으고, 뜨개질바늘을 교회 식구에게서 얻기로 하고 007 작전처럼 은밀하게 비대면으로 받아 와서는 뜨개질을 합니다. 유튜브에서 배우기도 하면서 팔이 아플 정도로 몰두해 가방도 뜨고, 옷도 뜨고, 모자도 뜹니다. 실이 모자라 인터넷으로 주문해 배달받아 또 뜹니다.
어떤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운동하고, 어떤 사람은 책을 읽고, 어떤 사람은 서툴지만 뜨개질을 합니다. 맘에 안 들거나 잘못되면 풀어 버리고 다시 합니다. 한참 떠 올라가다가 나중에 코가 빠진 게 보이면 너무 속상하죠. 그리고 고민합니다. 그냥 계속 갈 건지 아니면 아까워도 거기까지 풀어버리고 제대로 다시 시작할 건지 말입니다.
언뜻 보면 몰라 괜찮아 그냥 가자 하는 마음의 말이 들리기도 하지만, 다 만들었을 때 그 작은 오점이 걸려 후회하게 될까 봐 대부분 풀면서 돌아갑니다. 수정할 수 있다는 게 뜨개질의 아주 커다란 장점이거든요.
만일 우리 지나온 시간 중에 정말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 치명적인 뭔가가 있어도 그걸 지우러, 아니면 하지 않으려고 돌아갈 수가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기에 오히려 풀어 돌아갈 수 있다는 게 다행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그렇게 풀어 버릴 수 없는 단 한 번 만의 기회여서 조금 더 신중해지기도 하는 지혜를 배우기도 합니다.
요즘 자주 하는 말 중에 무너진 일상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또는 일상의 회복, 새로운 일상 그런 말들도 많이 합니다. 매체에서도 그런 얘기들을 많이 쓰기도 하고요. 공공장소에 갈 때 꼭 써야 하는 마스크가 처음엔 불편하고 어색하더니 이제는 하나의 패션이 돼서 디자인도 다양해지고 재질이나 프린트도 여러 가지입니다.
나도 저런 마스크를 갖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예쁘게 잘 만들어진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요. 간혹 아주 색다른 디자인이나 프린트를 해서 눈길을 끄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마스크에 콧수염이나 입술이 그려져 있는 그런 걸 쓰는 사람도 봤고, 명품 로고가 박힌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도 봤습니다.
유명 스포츠 브랜드에서 제작한 마스크도 있고, 직접 만들어서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게 손님한테 물어본 적도 있어요. 그 마스크 어디서 샀어요? 라고요. 이제 마스크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처음 마스크를 쓸 때 비하면 지금은 굉장히 익숙해지고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그런 자세가 우리 모두에게 생겼잖아요. 얼만큼 시간이 지나니까 그렇게 된 것처럼 우리는 어쩌면 시간에 비례해서 일상이 되었다, 아니면 일상이 무너졌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생각을 다르게 해봅니다.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익숙하거나 익숙하지 않거나 오늘의 일이고, 오늘 해야 하는 일이고, 지금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오늘의 일상입니다. 교회에서 대면 예배를 드리지 못한 게 벌써 석 달이 넘었습니다.
그래도 시간 맞춰 같이 스크린 앞으로 모여서 비슷한 시간대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각자 있는 곳에서 인증샷을 찍어 단톡방에 올리기도 합니다. 그런 것도 일상이 되었지요. 요즘 코로나 시국에 학교에서도 대면 수업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학업 성취도나 학업 능력에 편차가 너무 심하다 그런 우려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각자 자기가 있는 곳에서, 대면 예배를 드리지 못하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해 본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편차도 꽤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히려 한가해서 성경 읽기 좋다고 하면서 성경도 많이 읽고 또 말씀도 많이 찾아서 듣는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몹시 게을러서 내가 크리스천인지 아닌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이 ‘소소한 일상’을 끝내게 되는 마지막 이야기는 결국은 광야 이야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아는 출애굽 이후의 광야 말입니다. 우리네 사는 인생을 살다 보면, 광야 같다고 말할 때도 참 많이 있습니다.
먼지 나는 땅을 걸으며, 물을 찾고 그늘을 찾는 그런 고단한 삶이 광야의 모습으로 여겨지는데요. 다르게 보면 광야는 끝이 있습니다. 광야에는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 펼쳐져 있는 곳입니다. 오늘은 고단하고 피곤해도 언젠가는 도달할 가나안에 대한 희망을 품고 나서는 길이지요. 그래서 광야가 도리어 평안하다고 깨달아져 대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광야에 있는 게 맞는지, 아니면 아직 애굽에 그대로 있는 건 아닌지 하고요. 사는 모양은 다 퍽퍽하고 비슷하게 보여도 둘은 굉장히 다릅니다. 애굽에서는 가나안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내가 분명히 짐을 싸고, 무교병을 빚고,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고, 살던 집을 떠나 첫발을 내디딘 그 결단의 시간이 나에게 정말 있었는지 돌아보게 되는 그런 생각 말입니다. 단호하고 확실한 결단이 내게 없었다면 나는 아직 애굽에 있는 것이고, 가나안과는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수시로 생각해 봅니다. 나 광야에 있는 거 맞지? 이 길 끝에는 잠시 잠깐의 엘림이 아니라 가나안이 있는 게 맞지? 샛길로 가지 않고 내가 그 길에 서 있는 거 맞지? 그러면 기쁘게 살아집니다. 견디게 됩니다. 많은 샘과 많은 그늘에 마음 뺏겨 주저앉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은
오늘도
빛나는 광야를 걷는
작은 발걸음입니다.
그동안 소소한 일상을 읽거나 듣거나 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어느 길에서 만나도 반가울 거예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