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은 모두 32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였습니다. 19세기 초 독일의 거장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는 건반 음악의 구약성서를 이루고,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피아노의 신약성서를 이룬다”라고 말했을 만큼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음악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32곡 모두가 뛰어난 피아노곡이고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저는 특히 ‘고별’이란 이름이 붙은 26번 소나타를 좋아합니다. 이 곡을 작곡할 때의 베토벤의 마음이 애틋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 곡을 작곡한 1809~1810년은 베토벤이 귀가 거의 안 들려 고통스럽던 때였습니다. 소리를 생명으로 하는 음악가에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의 막막함과 고독함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을까요?
안 들리는 사람의 고독감
몇 년 전 제법 큰 수술을 받은 뒤 어느 날 오후 혼자 남은 병실에서 침대에 기대앉아 창밖 유리창 밖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병원 입구에서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마도 병문안 왔던 사람들과 환자의 가족이었을 것입니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 환자의 병세가 심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은 갔지만 그들의 이야기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별안간 이상할 정도의 궁금증이 일어나 유리창에 귀를 대듯이 귀를 기울였어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볼 수는 있어도 들리지는 않는 유리창 밖 정경을 바라보며 그 순간 저는 기이한 고독감을 느꼈습니다. 마치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외톨이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막막한 고독감을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베토벤의 고독감을 이해했던 사람
귀가 거의 안 들렸지만 극심한 고통과 싸우며 창작 활동을 이어가던 베토벤의 고독감을 이해하고 아껴주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루돌프 대공입니다. 대공은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프란츠 1세의 동생이었습니다. 당시 최고 유력자의 한 사람이었던 대공은 음악을 좋아하고 재능도 있어 10대 때부터 베토벤에게 피아노와 작곡의 수업을 받았습니다.
베토벤은 다정한 성격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루돌프 대공과는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어 마음을 주고받는 스승과 제자로 그리고 친구로 지냈습니다. 비록 괴팍한 성격의 스승이었지만 대공은 위대한 음악가로서의 베토벤을 존경하였고 베토벤은 총명하고 자기를 이해해주는 대공을 사랑했습니다.
대공과 베토벤이 평생 주고받은 편지가 100통이 넘는다고 하니 얼마나 친밀한 사이인지 알 수 있습니다. 대공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베토벤을 도와 마음 놓고 작곡에 전념할 수 있도록 평생토록 후원했습니다.
‘고별’소나타가 태어난 동기
이렇게 가까이 지내던 대공이 베토벤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1809년 4월에 나폴레옹이 거느리는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를 침략하여 5월까지 빈에 주둔하자 황제의 동생이자 왕족 신분이었던 루돌프 대공은 신변의 위험을 느껴 빈을 떠나 피신하게 됩니다. 이때 대공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에서 작곡한 곡이 바로 작품 81a의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입니다.
베토벤은 이 소나타의 1악장에 ‘고별(Das Lebewohl)’이라고 쓰고 원고에는 ‘1809년 5월 4일 빈에서 존경하는 루돌프 대공의 출발하심에 즈음하여’라고 적었습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대공에 대한 사랑이 그를 악보 앞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이 곡에 ‘고별’이라는 제목이 붙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곡은 모두 3악장으로 되어있는데 베토벤은 곡 전체의 제목인 ‘고별’ 이외에도 악장마다 그 주제에 따라 부제를 붙였습니다. 악보의 각 악장 시작 부분에 1악장은 ‘고별’, 2악장은 ‘부재’, 그리고 3악장은 ‘재회’라고 적었습니다.
1악장 고별(Das Lebewohl)은 석별의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2악장 부재(Die Abwesenheit)는 전쟁이 끝나 대공이 빈으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는 심정입니다. 3악장 재회(Das Wiedersehen )는 악보에 “경애하는 루돌프 대공 전하의 귀환, 1810년 1월 30일”이라고 적혀 있듯 재회의 기쁨입니다.
대공과 헤어져 있는 동안의 베토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곡이지만 곡 전체의 분위기는 떨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듯 대체로 따뜻한 느낌입니다. 이 곡을 듣고 있노라면 그 옛날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시선(詩仙) 이백(李白)을 생각하며 쓴 몽이백이수(夢李白二首)라는 시(詩)가 생각납니다. 두보가 그리워하고 염려하던 이백을 꿈속에서 만나고 썼다는 이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몽이백이수(夢李白二首)
死别已吞聲(사별이탄성) 죽어 이별은 울음조차 삼키게 하고
生别常惻惻(생별상측측) 살아 이별이란 언제나 안 잊히고 슬퍼라
11년의 적지 않은 나이 차이에도 두보(712~770)와 이백(701~762)은 의기투합하여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나중에 이백이 역적모의에 연루되어 유배 길에 올랐습니다.
유배 도중 사면되었지만 두보는 이 사실을 모르고 슬퍼하다 꿈에 이백을 보게 된 뒤 이 시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꿈에서라도 벗을 만날 수 있었고 그렇게 만난 벗의 안위가 얼마나 걱정스러웠으면 이렇게 시를 쓸 수 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18년 연하의 벗 루돌프 대공을 걱정했던 베토벤이 ‘고별’ 소나타를 작곡한 마음과 같은 아름다운 우정의 시입니다.
두보와 이백의 시대와 베토벤과 대공의 시대는 천 년 이상의 세월의 간극이 있지만 시대도 뛰어넘고 나이 차이도 뛰어넘는 진정한 우정이 배어 나오는 작품들이기에 베토벤의 ‘고별’ 소나타를 들으면 두보의 몽이백이수(夢李白二首) 시가 생각나나 봅니다.
강철의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Emil Gilels)
명곡이니만큼 좋은 연주가 많지만 화요음악회에서는 에밀 길렐스(Emil Gilels)의 피아노 연주로 들었습니다. 강철 같은 타건, 경탄을 자아내는 힘, 그리고 남다른 지구력 때문에 강철의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길렐스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Sviatoslav Richter)와 더불어 20세기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입니다.
두 사람은 러시아 피아노 전통과 모더니즘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며 러시아 피아니즘의 토대를 완성한 거장들입니다. 동시대에 활약하며 경쟁보다는 서로를 존경하며 우정을 나누었던 이들이 남긴 아름다운 일화는 언제라도 우리의 가슴을 영롱한 피아노 선율만큼이나 부드럽게 다독여줍니다.
1955년에 철의 장막을 뚫고 길렐스가 서방 세계에 나타났을 때 러시아 피아니즘에 대한 환상을 갖고 다가오는 기자들에게 그는 ‘리히테르의 연주를 들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기보다 친구를 내세우는 우정의 발로였습니다. 리히테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피아니스트라면 누구라도 시도하고 싶어 하는 그 유명한 베토벤의 ‘황제’협주곡을 녹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길렐스가 이미 녹음을 했기 때문에’라고 간단히 답했습니다. 그 답 속에는 길렐스를 향한 그의 진한 우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우정을 나눌 줄 아는 길렐스였기에 베토벤과 루돌프 대공의 우정이 담긴 ‘고별’ 소나타를 그렇게 잘 연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음악 감상을 마치고 이날 같이 본 하나님 말씀은 요한복음 15장 13-16절입니다.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 세상에 많은 친구가 있지만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친구는 참으로 드물 것입니다. 그런 우리 모두를 위해 돌아가신 분이 예수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친구라 칭하며 오라 하시는데 안 간다면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오라고 할 때 우리 모두 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