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긴 밤을 자고 일어나 지난밤에 설거지해서 엎어놓은 그릇들을 찬장에 넣어놓습니다. 아침에 먹으려고 끓여놓은 배추 된장국에 어묵 한 장 썰어 바로 넣어 한소끔 끓이고, 근처에 사는 딸애가 가져다 준 나물반찬을 조금씩 덜어 식탁에 차리고 기도를 합니다. 오늘도 건강하게 오늘도 평안하게 지내기를.
코로나가 생기기 전엔 외출도 자주 했지만 요즘은 잘 나가지 않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나서는 길은 그저 근처 시장, 병원 정도입니다.
멀리 사는 큰 딸은 가끔 전화를 하고 새로 태어난 증손녀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내기도 합니다. 너무 대견하고 이쁘지만 한번 안아 볼 수 있을까, 그러지 못 할까 봐 조금은 상심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아주 조금 기대합니다.
오늘은 점심에 친구랑 오랜만에 좋아하는 국수를 먹기로 해서 외출 준비를 합니다. 어제 저녁에 다려놓은 셔츠를 꺼내 입고 어떤 웃옷을 입을까 이것 저것 입어 봅니다. 코로나로 교회 예배가 온라인이 되면서 점점 나갈 일도 사람 만날 일도 별로 없던 차에 아주 신이 납니다.
제법 날씨가 차가워졌습니다. 이제 겨울 코트나 점퍼들을 꺼내고 여름 옷가지들은 정리를 해서 넣어야겠습니다. 식사 후엔 커피도 마셔야지 합니다. 커피를 좋아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도 좋아하던 아내와 생전에 즐겨 함께 다니던 곳에 가서, 늘 앉고는 했던 그 자리에 앉으니 아내가 보고 싶습니다.
날씨는 쌀쌀해도 하늘은 높고 파랗습니다. 하늘이 높고 파란 건 큰 딸네가 사는 뉴질랜드가 최곤데.
오래 전 이맘때에 뉴질랜드에 다니러 갔다 돌아오는 밤이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이륙하고 나서 보니 뉴질랜드 전역에서 불꽃 놀이를 하는데 그걸 비행기 타고 하늘에서 보니 아주 장관입니다. 그날은 사실 우리 부부의 결혼 기념일인데 꼭 축하해 주는 것 같다고 즐거워하던 날이 생각납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날이 가이폭스 데이라 폭죽을 터뜨리는 게 그 나라 풍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 해 전 딱 이맘 때 세상을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합니다. 하늘이 파래서.
엄마랑 아버지는 사이가 참 좋으셨습니다. 엄마 생일 때 꽃다발도 많이 사 들고 들어오시고, 두 분이 외출할 때 엄마가 꽃 단장 하느라 시간을 많이 써도 뭐라 하지 않으시고 예쁘게 하고 나와 하십니다. 아빠랑 친한 친구들을 보면 이상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어요. 아버진 언제나 엄마랑 제일 친하니까요.
한번은 아버지가 외국 출장을 다녀오셔서 우리 다 미제 연필이나 필통, 팀 이름이 적힌 야구모자 같은 걸 기대하면서 동생들이랑 아버지 여행가방을 둘러싸고 앉았는데 가방에서 나오는 건 모조리 엄마꺼였습니다.
동생들은 섭섭하고 속상해서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고는 난 그래도 리액션이라도 하느라 계속 앉아 있었지만, 마음에 꽁하게 갖고 있다가 얼마나 내가 이 이야기를 지금껏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가 부산에서 일을 하실 때 최소한 한 달에 두 번은 주말에 서울에 올라오셨는데 아버지가 오시는 날엔, 엄마는 반찬을 만드는 게 아니라 미장원에 다녀옵니다.
두 분이 서로 그렇게 살뜰하시니 난 아버지랑 친해지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내가 나이 들고 나서야 그럴 수 있었답니다. 이렇게 소소하게 글을 쓰고 목소리로 녹음도 하는 요즘의 나를, 세상에서 제일 대견하게 여겨주시는 아버지 이야기를 마지막 글에 꼭 하고 싶었습니다.
이십 여 년 전에 아버지가 위암 진단을 받으셨더랬습니다.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하러 가시기 전날 밤, 가족들이 모여서 같이 밥도 먹고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때가 은퇴하시고 나서 섬기시던 교회 사무장으로 일하기로 정한 후였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오셔서 위로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타고 가려고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시니 제자들이 “나귀 주인이 물어보면 뭐라고 할까요?” 하고 묻자 예수님이 대답하신 유명한 이야기 ‘주가 쓰시겠다 하라’ 였습니다.
실제 이 일화는 목사님의 책에도 실려있답니다. 아버지는 위를 절반이상 절제하는 수술을 하고 건강하게 교회 일도 오래 하셨고 지금도 씩씩하십니다.
그리고 그날이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하신다고 아파트 베란다 창문에 시트지를 붙이셨습니다. 우린 거실에서 숨죽여 울었고 아버지도 그러지 않으셨을까요?
그 후로도 늘 평안하지만은 않은 세월을 지나왔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보여주신 의연함이나 성실함은 우리들에게도 큰 본이 되어주셨습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가벼운 뇌졸증을 앓으시기도 했는데 좀 회복을 하시고는 뉴질랜드에 다니러 오신 적이 있습니다. 크게 표시는 나지 않지만 오른손이 예전처럼 자유롭지 않아서 불편해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 살던 집에 작은 정원이 있었는데 재활 삼아 하신다고 낫이랑 정원가위 같은 걸로 잔디를 깎으셨어요.
시간은 오래 걸려서 이쪽까지 다 깎았다 보면 저쪽은 다시 자라곤 했지요. 그래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뜰에 나가 오른손으로 가위질도 하고 낫질도하면서 잔디도 깎고 팔에 힘도 붙이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나와보라 하셔서 나가 봤더니 잔디밭에 한반도 지도가 그려져 있는 게 아니겠어요? 잔디의 길이를 다르게 해서 한반도에 제주도, 울릉도 독도까지 모양을 내서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지금도 가끔 남편이랑 얘기합니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집 안팎으로 깔끔할텐데라구요. 부지런하고 깔끔한 성격이시라 혼자 지내시는 지금 아버지 집은 늘 정갈합니다.
어서 코로나가 지나가 한국에 가고 싶네요. 아버지랑 맛있는 것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엄마한테도 같이 가고 싶습니다.
이렇게 날이 푸르르니 멀리 계신 아버지가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