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

성냥팔이 소녀(The Little Match Girl)는 덴마크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이 1845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몹시 추운 연말 저녁, 성냥팔이 소녀가 길거리에서 성냥을 팔고 있는데,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다. 소녀는 불 켜진 집을 들여다보며 가족끼리 식탁에 둘러앉은 행복한 모습을 부러워한다. 너무 추워서 집에 일찍 들어갈까 해도 술주정뱅이 아빠한테 혼날까 봐 엄두를 못 낸다.

소녀는 언 손을 녹이려 성냥개비 하나를 켠다. 그러자 따뜻한 난로의 환영이 나타났지만 성냥불이 꺼지면서 곧 사라진다. 또 성냥개비를 켜자 풍성한 음식이 차려진 식탁이 나타났으나 그 또한 사라지고 만다. 성냥개비를 하나 더 켜자, 이번엔 크리스마스트리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때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진다. 소녀는 누군가가 죽으면 별이 떨어진다던데, 라고 말했던 할머니를 기억한다.

네 번째 성냥개비에 불을 붙이자 이번엔 할머니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소녀는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남은 성냥개비를 모두 불태운다. 할머니는 소녀를 안아준다. 소녀는 너무 춥다고 하며 할머니가 계신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한다. 할머니는 소녀를 천국으로 데려간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꽁꽁 얼어 죽은 소녀를 보게 된다. 불쌍한 소녀는 그러나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묵상과 교훈
마태복음 25:31-46의 비유에서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을 섬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그들이 곧 주님이라는 말씀이셨다. 그 작은 자들을 돌본 자들을 주님은 복 받을 자라 칭찬하셨고, 그들을 외면한 무리들은 저주를 받은 자라며 책망하셨다.

이 말씀으로 조명해볼 때, ‘성냥팔이 소녀’에서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어가던 소녀를 외면했던 이웃들은 곧 주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원수 짓을 했던 술주정뱅이 아빠는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불쌍한 소녀를 지나쳤던 무심한 행인들이나 작품 내내 아무런 역할도 부각되지 않는 교회 역시 소녀의 죽음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단편을 읽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느끼는 첫 마음은 부끄러움이다. 자문해보자. 나라면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만사를 제쳐두고 그 소녀를 돌볼 수 있을까?

이 소설의 가장 멋진 반전은 얼어 죽은 소녀의 얼굴에 피어있던 미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춥고 배고파 죽어가는데, 소녀는 어떻게 얼굴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 미스테리처럼 여겨지는 바로 그 미소가 이 소설의 메시지다. 천국 소망!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우린 환난과 역경의 현실 속에서도 미소지을 수 있다.

추위와 배고픔뿐만이 아니다. 그건 핍박과 탄압일 수도, 또는 죽음에 이르는 질병일 수도 있다. 그게 어떤 것이든, 로마서 8장 39절은 그 무엇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릴 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소녀가 그랬듯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죽음 앞에서도 그 죽음 너머의 기쁨을 바라볼 수 있다. 히브리서 12:2 말씀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처럼.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2년간의 소설예배 연재를 마치며
소설은 허구, 즉 꾸며낸 삶이다. 과학용어를 빌리자면, 삶의 실험실 같은 곳이다. 여기선 동물이나 식물이 말하게 할 수도 있고, 시공간의 제약 역시 예사로 뛰어넘을 수 있다. 그 전개 방식이 어떻든 독자가 마주치는 건 소설 속 인물들의 다양한 삶이다. 난 그 삶들을 신앙의 훈련장으로 삼고 싶었다. 소설이 허구로 만들어진 이야기이므로, 소설예배를 드리는 것은 곧 가상의 현실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고 예배하는 훈련이 된다.

소설예배는 문학 활동이나 지식을 넓히는 교양강좌가 아니다. 글을 읽는 그리스도인만의 독특한 예배법이 소설예배다. 예수님을 만날 기대가 없다면 아예 소설을 읽을 이유가 없다는 결기로 책을 펼칠 때, 비로소 독서를 통한 예배가 시작되는 것이다.

소설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인 큐티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큐티는 일반적으로 성경->교훈->삶의 순서로 진행된다. 성경 본문을 먼저 읽고 그 교훈으로 내 삶의 적용점을 찾는 것이다. 정석이긴 하나, 다분히 교과서적인 게 아쉬운 점이다.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삶의 이슈들을 그날 하나의 큐티 본문이 모두 담아내긴 어렵기 때문이다.

큐티가 삶에서 힘을 가지려면, 삶->교훈->성경의 역순으로 진행하는 ‘거꾸로 큐티’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다양한 삶의 이야기에서 영적 교훈을 먼저 발견한 다음, 그 교훈의 뿌리가 된 성경 말씀을 찾아 묵상할 때 나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개별적으로 들을 수 있다.

이러한 ‘거꾸로 큐티’를 우린 소설예배를 통해 훈련할 수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을 성경 말씀으로 조명하는 훈련이다. 그런 훈련을 우리 교회학교의 청소년들이 어릴 적부터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번 생각해보자. 학교에서 명작은 필독서다. 그런데 교회에선 명작이 열외다. 학생들이 소설이란 허구 속에서 성경의 교훈을 찾는 훈련을 받지 못하니, 실제 학교생활 속에서 성경을 따라 살아가는 일 또한 어렵기만 하다. 명작 따로, 성경 따로의 삶은 학생들이 어른이 된 후에도 현실 따로, 신앙 따로의 삶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비극을 직접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소망컨대, 교회에서 학생들에게 소설예배를 권장하는 날이 오게 되길 바란다. 명작을 읽고 그 독후감을 성경의 눈으로 나누는 훈련을 거듭할 때, 차세대 청소년들이 장차 세상에 나가 신앙으로 승리하는 법을 배워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필자는 <한국기독교작가협회>와 에 소속된 소설가다. 그런데도 난 스스로를 문학인이라 자처해본 적이 없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초등학교때 백일장에 입선 한 번 해보질 못했고, 중고교시절 문학 청소년들을 보면 나완 다른 길을 걷는 친구들로 생각했었다.

왜 주님께선 평생 문학과 거리가 멀었던 나를 작가로 삼으셨을까? 짧은 소견으론, 나같은 사람도 글을 쓰고 있으니 그리스도인 중 그 누구도 글쓰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려는 게 아닐까 싶다. 만약 그런 용도로라도 쓰임 받을 수 있다면, 부족한 나로선 더없는 영광일 것이다.

돌이켜 보니, ‘크리스천라이프’의 필자로 독자를 섬겨온 지 벌써 5년이 되었다. 그동안 작가의 입장에서 창작 3편을 썼고, 독자의 입장에서 명작 48편을 감상했다. 부디 글의 못난 점은 다 잊어 주시고, 혹 여러분의 심령에 소설예배를 통해 예수님의 형상이 이슬방울만큼이라도 맺힌 부분이 있다면 그 보물만큼은 오래도록 간직해주시길 소망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