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긴 어게인(Begin Again)

비긴 어게인-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을 바라보며 이 멋진 말을 머리에 떠 올립니다. 몇 년 전 동명의 영화가 블록버스터도 아니면서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대중 앞에서 부르기를 부끄러워하던 수줍고 낙심에 찬 한 여성이 실패를 거듭하고 모든 것을 포기했던 한 음악 피디와 만나 서로의 격려와 위로 속에서 새로워지고 자신에 찬 가수의 꿈을 이룬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버려진 별들’(Lost Stars)이란 주제음악이 큰 반향을 불러 모았던 영화였습니다. 흔히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인간에게 내일을 볼 수 있는 눈은 주어지지 않았을까? 왜 사람들은 내 눈에 비치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을까? 왜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할까?

1965년 스웨덴의 렘난트 닐슨은 태아의 형성과정을 최초로 촬영한 사진을 발표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태아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제일 먼저 눈(eye)부터 형성된다는 사실을 밝힌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이 아름답고 총명한 두 눈이 인생의 황혼기가 되면 너도나도 예외 없이 시력저하가 찾아오고 스스로 내가 늙어 간다는 신호를 감지하게 됩니다. 눈에서 시작하여 눈으로부터 쇠퇴하는 육신의 변화, 참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육신의 눈 만 가진 것이 아니지요. 인간이 가진 또 다른 상상의 눈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실제로 보는 것처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만이 가진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벽 뒤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출근한 남편의 일상을 아내는 집에서도 상상의 눈으로 보고 있는 눈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눈은 허상을 볼 뿐입니다.

사람이 가진 또 하나의 눈은 마음의 눈입니다. 마음의 눈은 믿음의 눈이요 영적인 눈을 말하며 상상의 눈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눈입니다. 영안은 사람마다 다 가진 것이 아니며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회복됨으로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상상의 눈을 밝혀도 볼 수 없는 무궁무진한 세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진정한 비긴 어게인은 이 마음의 눈을 밝혀야 가능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지난 추석에 방송된 가수 나훈아의 ‘힘내라 대한민국’ 특집방송에서 그가 부른 노래 중, ‘테스 형’이라는 노래가 지금 곳곳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가사 중 재미난 구절이 등장합니다.

‘아! 테스 형 소크라테스 형, 세월은 또 왜 저래,
먼저 가 본 저세상 어떤가요 테스 형,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가요 테스 형’

그의 노래실력뿐 아니라 작사 작곡 그리고 행사를 위한 대단한 기획과 연출을 통해 국민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노래 3가지 주제 중, 고향에서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사랑은 이별과 눈물을, 인생은 허무와 죽음만을 노래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이제는 미움에서 사랑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되는 더욱이 보이지 않는 천국을 볼 수 있는 눈으로 새 노래로 다시 시작하는 비긴 어게인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각자의 세월 속에서 힘들고 아픈 고민과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풀기 어려운 문제일지라도 그 뒤에 숨겨져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소와 행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 때문에 내가 고독해도, 돈 때문에 내가 비천함의 굴욕을 당해도, 믿었던 친구로부터 내가 배신의 뼈아픔을 맛보았을지라도 마음의 눈을 밝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비긴 어게인을 우리 모두가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밤이 깊어도 아침은 오고, 먹구름 뒤에도 태양은 빛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것은 마음의 눈을 가진 자만의 특권입니다.

비긴 어게인은 단순히 내가 지금까지 손해 본 것을 만회하기 위한 시작이 아닙니다. 성공을 위한 각오만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능력이 나를 감싸주고 나를 품어주심을 믿는 믿음의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원을 향한 비긴 어게인의 길임을 믿는 믿음입니다. 보지 못하고도 믿는 자가 더 복되다는 이 중요한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진정한 비긴 어게인의 새 해를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은 고해라고 하지만, 진정 주목하고 소망해야 할 것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보이지 않는 것에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에 실망하고 주저앉아 내일을 잃은 인생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일까요.

보이는 것은 잠간 있다 없어질 것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성경의 진리는 보이지 않는 것의 신비를 깨닫고 믿는 자에게 언제나 새롭게 비긴 어게인 할 수 있음을 확신케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고 매일 매일 답답한 삶의 연속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며 누구나 비긴어게인으로 제2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로 돌아간다는 말처럼 내 손에 가진 것 아무 것도 없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진정한 비긴어게인 말입니다.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로 알려진 ‘死(사)의 찬미’, 그것은 죽음의 찬가입니다. 하필이면 왜 죽음의 찬가였을까요?
‘황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이 최초의 한국 대중가요를 부른 윤심덕이란 여가수는 당시 일제 강점기시절 동경음악학원을 졸업한 장래가 촉망되는 신여성이었지만 비극의 짧은 삶을 살고 말았습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져 노래의 가사처럼 결국 ‘인생은 허무한 것이요 죽으면 그만이지’ 라는 노래를 남기고 애인과 함께 현해탄을 건너는 연락선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허무를 노래하면서 진정 죽음의 의미와 삶의 신비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철학자는 출생과 죽음사이의 선택을 말하는 현자일지 모르지만 진정한 현자는 죽음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죽음너머의 시간을 헤아리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삶은 행복한 죽음과 연결되어 있고 행복한 죽음은 죽음너머의 세계 즉 영원한 영광의 세계를 확신하며 언제나 비긴어게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참으로 신비한 것이지요. 사람이 태어나서 한 평생 살다 어딘지 모르지만 떠나가는 것 정말 신비롭지 않습니까? 신비롭다는 말은 아무리 내가 순간순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 같아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가장 슬기로운 사람은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매일매일 비긴어게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이사야 43; 18-19)

새해에도 비긴어게인의 축복이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