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교회창립일, 국가기념주일에 부르는 의식찬송
영국작곡가인 존 러터(John Rutter)의 ‘레퀴엠’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죽은 이들을 위로하는 작품입니다.
그 중 다섯째 곡인 ‘하나님의 어린 양’을 들어보면 “하나님의 어린양이여 세상 죄를 지시는 주여”라고 소리 높여 외쳐 부르다가 “우리에게 안식을 주소서”라고 기원을 드린 후에 마치 응답처럼 고요하게 플루트의 솔로 멜로디(66-72마디)가 간주로 이어집니다.
부활절 부속가(Sequence)인 ‘유월절 어린 양께 찬미를 드려라’라는 그레고리안 멜로디인데, 죽은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다시 부활하리라는 암시를 줌으로서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죠.
이처럼 작곡가는 곡에서 라이트모티프(Leitmotiv, leading motive)라는 작곡기법으로 음악상의 동기에 의해 어떤 인물이나 장면, 상념(想念) 등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 기법은 바그너가 후기 오페라에서 처음 사용한 것인데요, 시도동기(示導動機), 유도동기(誘導動機)라고도 일컫습니다.
이와는 딱히 같진 않아도 축제나 특별행사를 위한 작품에 전통적으로 특별한 뜻이 깃든 찬송가선율을 차용하는 일은 흔히 있습니다.
LOBE DEN HERREN(21장)을 사용한 멘델스존의 교향칸타타 ‘찬양의 송가’(Lobgesang)라든가 DIR, DIR, JEHOVAH(22장)를 사용한 린크(J.C.Rinck)의 ‘경배하라 우리 하나님’이 그 예이죠.
찬송시는 ‘영국 찬송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이작 왓츠(1674-1748)가 시편 90;1-5을 8.8.8.8의 운율로 의역(意譯)하여 지었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시편 90;1)는 “예부터 도움 되시고”의 1절가사로,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편 90;2)는 “이 천지 만물 있기 전”의 2절, 이런 식으로요.
이 시는 1714년에 지었는데, 몇 년 후 그가 편찬한 ‘다윗의 시’(Psalms of David, 1719)에 ‘연약한 인간과 영원한 하나님’(Man frail and God eternal)이란 제목으로 실어 발표하였습니다.
원래 이 시집에 처음 실린 가사는 “Our God”으로 시작하는 시였는데, 20년쯤 지난 후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목사가 찬송집 ‘시편과 찬송’(1738)을 편찬하면서 “O God”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후 모든 찬송이 이 가사를 사용하고 있죠.
ST.ANNE이란 곡조이름은 이 멜로디를 작곡한 크로프트(1678-1727)가 오르가니스트로 섬기던 런던 소호(Soho)에 있는 교회이름입니다. 원래 이 곡조는 왓츠 가사가 붙기 이전에는 시편 42편을 위한 찬송시의 곡조(A Supplement to the New Version of Psalms, 1708)로 불리었습니다.
워낙 이 시가 좋으니까 옛 찬송 시는 잊히고 만 것이죠.
저는 몇 해 전 담임목사 위임식 때 이 찬송이 나오는 디킨슨(C. Dickinson)의 찬양곡(anthem)을 연주하여 회중과 함께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섬기는 남대문교회는 1887년 우리나라 최초로 알렌(Allen)이 세운 제중원(濟衆院)이 모체가 되는 교회이거든요.
디킨슨의 ‘주의 이름은 크시고 영화롭도다’는 앤덤 중에도 최고의 걸작이죠. 특히 중간부분에 베이스부터 시작하여 대위기법으로 “통치하네. 위엄과 권세로서 능력이 많은 주”를 포르테로 노래한 후 코랄성가대와 어린이합창이 무반주 피아니시모로 부르는 이 찬송 ST.ANNE 멜로디의 신비로움,
이어 복합창(複合唱, double chorus)과 트럼펫 팡파르와 함께 천지를 뒤흔드는 장엄한 ‘아멘’ 찬양, 그야말로 백미(白眉)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섬기고 지켜온 교회에서 부르는 “예부터 도움 되신 주!” 어떻습니까? 딱 들어맞지 않아요? 이 찬송은 국가기념주일, 창립주일 같은 큰 행사 의식찬송으로 불리곤 합니다. 영국의 처칠경의 장례식 때 성 바울교회에서 불러 유명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