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방송 중에 연예인의 집을 찾아가 순전히 물건들을 정리하고 가구를 재배치하는 것만으로 완전 새집 같이 바꿔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어떤 공간이 되었으면 좋을지 의뢰인에게서 듣고, 문제점을 찾아내고, 공간의 재구성이란 이름으로 가구나 물건의 위치를 바꾸고 정리해서 의뢰인의 요구를 충족시켜 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의뢰인의 사정과 사연을 듣기도 하고, 현재 상태를 점검하고, 바라는 공간의 모양을 알아들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사실은 짐을 줄이는 일입니다.
커다란 박스들을 집안으로 들여다 놓고 꼭 필요한 물건, 버리는 물건, 그리고 내 욕구로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필요하진 않아서 나누어서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이 되게 하는 물건으로 분류하게 합니다. 꼭 필요한 물건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이렇게 저렇게 치워집니다.
뭔가 획기적인 변화를 얻으려면 공간을 비워내야 하기 때문이죠. 며칠간의 작업이 끝나고 상상 이상으로 멋지게 변신한 집을 보면서 의뢰인이나 그 가족이 감동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주변을 둘러봅니다.
나 역시 얼마나 많은 짐에 치여 있는지, 그래서 내가 원하는 공간의 모양은 어떤 건지 생각을 해봅니다. 그 방송을 본 친구들도 앨범을 정리했네, 옷을 정리했네 합니다. 정작 나는 들여다만 보고 엄두를 못 내고 있지만 구석구석 뒤져 보고 무엇을 남길지, 어떻게 없앨지, 어떻게 재배치하면 좋을지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십여 년 전에 펜션 하우스에서 지내시던 어머니가 우울증에 저혈당 고혈압으로 편찮으셔서 집으로 모시기로 하고는 어머니는 옷가지만 들고 집에 오시고, 난 친구들과 어머니 사시던 집을 치운 적이 있습니다. 원룸인 그 집에 짐이 얼마나 쟁여 있었는지 서랍이며 벽장에서 끄집어낸 옷가지만으로도 어마어마해서 산더미 같았습니다. 그중에서 30퍼센트 정도는 골라서 집으로 가져오고 나머지는 없앴습니다.
몇 차례에 나눠서 버리기도 하고, 구세군 중고용품 가게에 전화해서 아예 트럭을 불러 가구와 그릇들이랑 모두 도네이션 했습니다.
한 3일은 매달려 그 집을 치웠는데 그때도 그랬죠, 나도 당장 짐을 줄여야 된다고요. 내가 아프거나 죽거나 해서 내 짐을 치울 일이 꼭 있을 텐데 그때 너무 힘들지 말라구요. 아니 너무 흉보지 말라구요. 그런데 그때 그 다짐도 무색하게 아직도 그대로 이고 지고 이사를 그 후로도 두 번 했나 보네요.
친정 부모님이 쓰시던 침대, 화장대, 장식장, 테이블, 도자기, 그림, 서예 도구와 그릇들을 한국으로 가실 때 남겨놓고 가셔서 많은 건 내가 쓰고 있지만 진열만 해놓은 것도, 포장된 채로 있는 것도 있습니다.
오륙년 동안 이곳에서 살던 동생이 한국 들어갈 때 남겨놓고 간 물건도 조금 있고, 요양병원으로 들어가신 시어머니의 물건까지 포함하면, 정리를 잘 못하는 성격에 물건들이 다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남편 어린 시절의 앨범,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들, 살 빠지면 입으려고 남겨놓은 예쁜 옷, 선물로 받은 스카프들과 화장품, 애들이 어릴 때 갖고 놀던 야구 글러브, 스페인 유학하고 온 친구가 사다 준 투우 경기 포스터를 인사동 액자 가게에서 맞춰 끼워서 여태 갖고 있다가 얼마 전에 치운 큰 액자, 두 폭짜리 병풍, 아들 이름이 들어간 도자기 병, 백년해로하라는 의미로 선물 받은 내 이름과 남편 이름이 들어간 서예 액자, 각종 선물 포장재와 라벨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색연필이랑 싸인펜, 높아서 잘 안 신는 구두, 너무 깊이 높이 올려놔서 정작 몇 년은 쓰지 않은 그릇들, 예전에 즐겨 듣던 CD와 진짜 오래된 LP판, 그 물건들이 이제 짐이 되었지만 그 물건들에겐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이 있어 말을 건네니 없애기로 마음먹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녜요.
호주에서 독일, 미국에서 친구들이 보내준 편지나 엽서는 말할 것도 없고, 친정엄마가 아끼시던 장식품들과 그릇들도 그리운 사람을 그립게 합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받은 리포트나 사진들, 선물을 싸고 묶었던 고운 리본들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도 짐도 줄이고 집도 줄이고 바다가 가까운 데서 미니멀 하게 살고 싶으니 지금부터라도 줄여야 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천천히 조금씩이라도.
고무줄이 늘어나고 옷깃이 해진 오랜 시어머니 옷가지를 정리해서 버립니다. 유행이 지난 선글라스와 신발, 여러 모양의 모자들을 골라서 작년에도 입지 않은 옷들을 모아 OP 숍에 전달합니다.
낡은 앨범을 열어 사진을 떼어내어 작은 상자에 담고 앨범은 버립니다. 어떤 가구를 없앨 건지 순서를 정해 놓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상당히 에너지가 필요해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번엔 확실히 줄여 보려고 합니다. 공간의 여유와 쾌적한 환경으로 행복해지고 싶으니까요.
잘 버리지 못하고, 사는 것도 좋아해서 짐이 점점 늘어가는 데 정작 잘 누리지는 못하고 오히려 뒤로 밀어 넣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며칠 전에 작은아들이랑 이야기를 하다가 이사 다닌 여러 집 중에 어느 집이 제일 좋았냐고 했더니 넓은 뒷마당에서 사촌들이랑 놀았던 시절의 집을 고릅니다. 난 개인적으로 그때가 제일 힘들었었는데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동생네가 들어와 같이 살았고, 홈스테이 학생들도 있는데 큰 아들네에서 지내시던 시어머니도 사정상 우리 집으로 들어와 계셨던 한 1년여 기간이 몸도 마음도 정말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아들은 또래 사촌이랑 노는 게 즐거웠다니 참 다행입니다. 기억과 생각은 다 주관적인 면이 많고, 학습되지 않은 느낌과 감동은 제 각각이니까요.
물건에는 크기와 부피가 있습니다. 물건에 담긴 이야기와 마음의 크기는 그 물건의 크기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남기고 물건은 없애려고 합니다. 가벼워져야 날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