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

좋은 죽음, Well dying
노인인구의 증가,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어, 건강하게 살다가 평안한 임종을 맞고자 하는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호스피스 운동에 영향을 끼쳤던 퀴블로 로스(Kubler-Ross, E)는 말기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말한다.

“무기력하고 고통받는 한 인간을 보는 그 순간에 우리는 겁에 질린다. 하지만 그 사람을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환자에게 남아 있는 능력들을 활용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힘을 합쳐서 그 환자를 어떻게든지,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삶은 그 자체보다 해석이 중요하다. 환자가 새롭게 자기 죽음을 해석할 때, 그 인식의 전환이 삶의 질을 향상할 수 있다.

미국 내과학회지에서 밝힌 좋은 죽음의 요소는 통증 완화 및 조절, 명확한 의사 결정, 죽음 준비, 훌륭한 마무리(갈등 해소, 인사),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여,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 등이다. 좋은 죽음의 개념이 문화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강조되는 요소는 ‘평안함’과 ‘존엄성’이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고통받는 말기 환자가 의료적으로 삶을 연장하기보다는 진정으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네델란드의 엠뷸런스 소원재단(Ambulance Wish Foundation)은 임종을 앞둔 사람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단체이다. 이 단체에서 밝힌, 말기 환자들이 원하는 마지막 소원은 ‘딸의 결혼식 가기, 동물원 가기, 거리에서 아이스크림 먹기’ 등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온화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삶을 마무리하고 일상에서 평온한 죽음을 맞기 원했다.

죽음은 관계의 문제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죽음의 이미지를 물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가족과 함께 있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들이 말하는 좋은 죽음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좋은 관계’였다. 평화롭게 죽는 환자들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삶이 풍요로워졌다고 느끼는 가족들은, 서로 관계가 좋고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활발하게 대화하는 성향이 있다고 한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서 자식을 키웠던 70대 어머니가,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면서 자식들에게 쓴 유언장이다.

자네들이 내 자식이었음이 고마웠네/ 자네들이 나를 돌보아 줌이 고마웠네/ 자네들이 세상에 태어나 나를 엄마라고 불러주고/ 험한 세상 속을 버틸 수 있게 해줌도 자네들이었네// 병들어 하나님 부르실 때/ 곱게 갈 수 있게 곁에 있어줘서 참말로 고맙네/ 자네들이 있어서 잘 살았네/ 자네들이 있어서 열심히 살았네// 큰애야 맏이 노릇하느라 힘들었지?/ 둘째야 일찍 엄마 곁 떠나 홀로 서느라 힘들었지?/ 막내야 공부하느라 힘들었지?// 고맙다, 사랑한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자.

좋은 죽음은 당사자 개인을 넘어서, 주변 사람들의 관계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죽음을 결정하는 문제는 단순히 개인 자신의 문제이기보다, 자신과 가족, 주변과의 관계를 모두 고려해야 하는 문제이다.

죽음은 결코 자기 결정권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죽음의 결정은 신중해야 한다. 특별히 자살로 삶을 끝내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자살은 삶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남겨진 자들에게 큰 고통이 남는다. 자살한 사람들의 가족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다. 그 고통은 엄청나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결정은 관계적인 요소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신앙은 관계이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이웃과의 관계이다. 그 관계를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 사람이 사는 이유 중 하나가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좋은 죽음이란 고통이 없는 평안한 죽음이라고 하지만, 그것에는 삶과 관련된 내용이 빠져 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오래 사는 것이, 좋은 죽음(호상 好喪)이라고 말한다. 장수하는 것이 축복이라고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에서 이 세상의 의견과 다르게 말씀하신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림을 보여주신다. 죽음은 단순히 생명의 물리적 정지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는 “영생”이 더 귀중한 일이라고 지적하신다. 부자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축제하며 사는, 세상에서의 삶은 복이 되지 못했다. 그는 매일 자신의 문 앞에 구걸하는 나사로와의 관계도,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과의 관계도 소홀했다. 그는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그의 잔치하는 삶은 영원한 저주 가운데 빠졌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 맺어야 한다. 이 관계를 통해 믿음으로 죄 사함과 구원함을 받아 영생을 얻는 것이 가장 귀중하고 보배롭고 복된 일이다. 그 구원을 통해 세상과 이웃과 관계 맺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호스피스 사역은 말기 환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주는 것이다. 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재창조의 일을 한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에 소망을 가지고 구원에 이르도록 돕는다. 육신적인 이별의 슬픔을 잘 견디도록 가족들의 관계를 지지해 주는 부활 신앙 운동이다.

부활 신앙으로…
호스피스 사역은 부활신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부활 신앙은 죽어도 살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부활 신앙이 있어야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다. 십자가와 부활이 없는 복음은 존재할 수 없다. 부활 신앙이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있으면 삶이 회복된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마르다에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5~26).

사도 바울도 고백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한 죄목으로 죽음을 맞는다. 그는 마지막으로 교수대에서 말한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이것이 삶의 시작입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 부활 신앙을 보여준다. 죽음이 곧 삶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죽음을 너머 소망과 기쁨의 세계가 분명히 있다. 죽음을 마주할 때, 궁극적인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부활 신앙, 천국 소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신앙인은 이 세상을 살고 있지만 동시에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부활 신앙을 통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참신앙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