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품격

코로나 19 사태는 인류가 겪은 큰 불행으로 기록에 남을 것이다. 지구촌 곳곳에 퍼진 바이러스는 죽음의 공포를 더 해주고 있고, 지역봉쇄와 이동을 금하는 조치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수많은 안타까운 사연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등, 그 예쁜 이름들도 아무 소용없이 대형 관광 크루즈선들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한다. 호화 유람선의 승객들이 입항을 거부당해 바다를 떠돌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해 절규하는 모습들은 충격적이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선박 내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던 수많은 근로자들이 자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선박 속에 지금도 갇혀 지낸다는 뉴스는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끼게 한다. 아마도 승선 시에는 이들 모두 다 최고의 품격이 묻어나는 여행을 꿈꾸었겠지만 그곳이 바이러스의 온상이 될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 비극적인 여행이 되고 말았다.

몇 해 전 아내가 하와이 여행을 다녀왔다. 한국의 딸이 엄마와 함께 여행을 가고 호주의 아들도 그곳에서 합류한 것이다. 아들딸이 고맙고 감사하지만 나는 이 여행을 사양하고 대신 한국 남해안의 섬들을 여행하는 나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하와이 여행을 사양한 특별한 이유는 내가 가진 가슴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기 싫어서였다. 세월은 수십 년이 지났건만 그 기억은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 사건은 내가 아내와 철없었던 두 아이를 이끌고 미지의 땅 남미를 향해 한국을 떠났던 사연과 얽혀 있다.

당시 LA 행 비행기는 김포를 출발해서 동경을 거쳐 하와이의 호놀룰루 공항에서 모든 승객들이 미국 입국심사를 받아야 했다.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여권을 모두 뺏기고 말았다. 미국 땅을 벗어날 때 돌려주겠다는 말만 하고 회수해 버린 것이다.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우리는 하와이와 LA, 그리고 마이애미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탈 때마다 장시간 격리되는 경계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때 받은 모멸감과 긴장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의 처우가 너무나 야속하게 느껴졌고 우리를 지치게 만들었다. 남편과 아빠만 믿고 따랐던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런 하와이를 여행한다고?

나는 아들딸에게 엄마와 함께 좋은 여행하며 그때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말끔히 씻고 좋은 추억안고 돌아오라고 말하며 아내의 등을 떠밀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아내의 흥분된 어조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감상문이 문자로 전송되어 오기 시작했다.

정말 다행이구나. ‘당신 가슴속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불편했던 사연들일랑 깨끗이 씻고 오길 빌어요.’ 나는 이 여행을 통해 젊은 시절 겪었던 상처가 치유되는 힐링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했다.

코로나 사태만 아니라면 지금도 세계도처에서 한국 여행객이 차고 넘칠지도 모른다. 여행을 통해 얻는 점은 이루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여행 중에 좋은 친구를 만나고, 견문을 넓히고,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기도 한다.

여행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깊게 들여다보는 자기성찰의 기회를 얻기도 하고, 내일을 설계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정신적 육체적 쉼을 얻는다는 것이다. 지치고 힘든 마음과 육신을 쉬게 하는 치유의 시간들이 보람차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모든 여행이 다 그럴까? 모두 그랬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오히려 더 지쳐서 돌아오고, 친구의 우정이 더 멀어지고, 감염이나 사고의 불행이 도사리기도 하니 언제나 값진 여행의 기쁨만을 안고 돌아오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행복한 여행, 성공적인 여행을 위해서는 제일 먼저 짐이 가벼워야 한다. 한국의 7-80년대 이민자들은 어김없이 사람 덩치만한 이민가방을 끌고 공항을 나서곤 했다. 해외여행이 쉽지 않았고, 별도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현지정착에 필요한 온갖 필수품들을 몇 개나 되는 대형 가방 속에 넣고 비행기를 탔기 때문이다.

내가 호주의 시드니에서 만난 L씨 가족은 남미의 파라과이(Paraguay)에서 10년 동안 살다 다시 호주로 이민 갈 때 엄청난 크기의 대형 이민 가방 20개를 끌고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 짐들을 남미에서 호주까지 끌고 오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을까를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유럽 패키지여행을 하며 우리 부부가 기내용 가방 두 개만 가진 것을 본 일행들이 놀라는 것을 보고 미소로 응답했던 적이 있다. 가방이 크면 눈치 보며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국 입국에서부터 기분을 상하고 만다.

즐겁고 행복한 여행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짐이 적어야 반가운 이들과 빨리 만날 수 있다. 가방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여행 일정을 느리게 하고 여행의 즐거움을 맛볼 여유를 빼앗아 가 버리고 만다.

우리의 인생 여정(life journey)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온갖 거추장스러운 것들 움켜쥐고 욕심 부릴수록 가는 길이 괴롭기만 하다. 잡동사니들을 훨훨 떨어버리고 자유롭게 나서면 참으로 유쾌하고 기분 좋은 여행이 될 것이다.

행복한 여행을 위해서는 또한 동행할 좋은 친구가 있어야 한다. 나 홀로 여행은 외롭고 지친다. 여행 중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도 큰 행운이다. 그러므로 좋은 친구와 함께 하는 여행은 기쁨을 배가시킨다.

한편 함께 떠났던 친구와 돌아서고 더 멀어지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슬픈 일이다. 한 목표를 향해 함께 가는 진정한 동행을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해야 하며 친구를 배려하고 나를 죽여야 한다. 나와 함께 가는 친구를 행복하게 해줄 때 진정한 동행의 맛을 느낄 것이다.

아무리 수려하고 소문난 곳을 여행한다 할지라도 마음에 맞는 동행이 없으면 외로움과 초조함을 느끼듯이 각자의 인생 여정에도 함께 하는 진정한 동반자가 필요하다.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 여행을 위해 진정한 동반자가 늘 당신 곁에 있기를 기도한다.

행복한 여행을 위해 잊지 말아야 할 또 한 가지는 돌아갈 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을 나서면 외로움과 불편함, 배고픔과 두려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 돌아갈 집이 있고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따뜻한 보금자리가 있음을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행복을 느낀다. 돌아갈 집이 있는 순례자와 돌아갈 집이 없는 방랑자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여행의 종착지는 자신의 돌아갈 집이다. 돌아갈 곳을 아는 여행자와 갈 곳을 알지 못하는 여행자의 차이는 바로 사느냐 죽느냐의 차이다. 인생을 흔히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나그네로 비유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순례자 낯선 나라에 언젠가 집에 돌아가리
어두운 세상 방황치 말고 예수와 함께 돌아가리
나는 순례자 돌아가리 날 기다리는 밝은 곳에
곧 돌아가리 기쁨의 나라 예수와 함께 길이 살리

우리 모두는 이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 지금 누구와 함께 어떤 여행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며, 오늘도 모두가 행복한 여행, 아름다운 인생 여정이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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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일
고려대학교 및 낙스 신학대학 졸업, 해밀턴 세인트 앤드류 장로교회 부목사 및 한인교회 담임과 뉴질랜드 장로교 총회 아시아 총무를 역임했다. 오클랜드 새노래 장로교회 원로목사로 있고, 잊을 수 없는 이민 선 후배와 다음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연재 통해 나누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