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남섬 크라이스트처치는 차가운 날씨로 인해 겨울을 실감하고 있다. 한국 같은 매서운 찬바람이나 폭설은 아니지만 새벽녘에 집을 나설 때면 영하로 뚝 떨어진 날씨에 옷깃을 세우게 된다. 뉴질랜드 주택 특성상 난방이 잘 안 되어 그런 것도 있지만 이처럼 쌀쌀한 기운을 안고 지내다 보면 활동성도 떨어지고 몸도 마음도 움츠려 들기 마련이다.
목회 길에도 오랜 기간 같은 길을 걷다 보면 잘 가고 있던 길이 끊어져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낄 때 홀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분명 이 길이라 생각하고 계속 걸어오던 길 위에서 길이 끊어진 것 같을 때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제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이 길이 분명한가? 되물어 보게 된다.
신앙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 날이 어둡기 전에 사막을 벗어나야만 했다. 사막의 밤은 극도로 춥고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헤매던 중 그는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발자국을 따라가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발걸음을 옮겨놓아도 사막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이윽고 사방이 어두움으로 둘러 쌓이고 추위가 몰려오자 그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더 이상 한 걸음도 옮길 힘도 없어 주저앉은 그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자신이 따라갔던 발자국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발자국이었던 것! 그는 자기 발자국을 따라 계속 크게 원을 그리며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윤형방황(輪形彷徨)이란 말이 있다. 방향 감각을 잃고 원을 그리듯이 목표에서 빗나간 걸음을 걷는 현상을 말한다. 실제 알프스에서 길을 잃고 13일 만에 극적으로 구출된 등반자가 있었다. 이 사람은 매일 12시간씩 사투를 벌이며 걸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길을 잃은 장소로부터 반경 6km 이내에서만 빙빙 맴돌았던 것이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대부분 죽는 이유는 아무리 걸어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눈을 가린 채 넓은 공터를 걸어 보면 20m를 지나면 4m가량 치우치게 되고 100m쯤 가면 결국 큰 원을 그리며 도는 형태가 된다고 한다.
사막에서 이와 같은 윤형방황을 이겨내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나침반에 의지하거나 밤에 북극성을 찾아 방향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생각대로 과감히 성큼성큼 걸어가되 30 걸음쯤 가다가 잠시 멈춘 다음 다시 30 걸음을 걷고 또 멈추고를 반복하는 것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아무리 멋지고 비싼 차라도 핸들과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바로 갈 수 있어야 하고 멈춰 서야 할 때 제대로 멈출 수 있어야 좋은 차량이다. 내 인생의 핸들과 브레이크는 어떠한가? 그것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종종 점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목회의 길에도, 신앙인의 삶에도 이런 뒤 돌아봄은 그래서 꼭 필요하다.
내면의 나침반을 따라가 보라.
내면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알 수 있다면 길을 잃었을 때에도, 지도가 없는 곳에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사막의 모래땅은 끊임없이 변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지도가 무용지물이 되곤 한다.
그래서 사막 위에서 지도를 따라 가다 보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오직 내면의 나침반을 따라가야 한다. 신앙인에게 나침반은 무엇이겠는가?
환경에 따라, 사람에 따라 바뀌지 않고 언제나 정확하며 공평하게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다. 종종 조용한 곳을 찾아 홀로 주님 앞에 서는 시간들을 갖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묵상을 통해, 영성 일기를 통해 하나님과의 대화의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날 때마다 쉬지 않으면 인생의 사막, 변화의 사막은 우리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한다.
호주 내륙 사막지역을 차량으로 여행할 때 모래에 바퀴가 빠지게 되면 타이어의 바람을 약간 빼라고 조언하는 것을 들었다. 타이어에 바람이 꽉 차 있을 때는 바퀴가 돌면 돌수록 모래에 더 깊이 파묻혀 꼼짝달싹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이어에서 바람을 뺐을 때 갇힌 모래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인생의 사막에 갇힐 때에도 힘을 빼라는 말이다. 사하라 사막에서 말하는 죽음의 구역은 바로 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어느 땐가는 또 길을 만나고 또 길 위에서 길이 끊어지는 막막함을 경험할 수 있다. 때로는 오아시스를 만나 지친 다리를 쉬어가기도 한다.
사막과 인생은 많이 닮았다. 혹시 지금 인생의 사막에서 헤매고 있지는 않는가? 길 위에서 길이 사라져 방황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면 오아시스를 지나쳐 버린 채 지쳐 있지는 않는가? 인생의
사막을 건너고 있다면 내면의 나침반을 따라가 보라.
길이 보여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순종할 때 길은 보인다
예루살렘 감람산에 오르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전망 산이 있다. 다윗이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며 도망치던 곳 (사무엘하 15:30)이다. 당시 다윗은 머리를 가린 채 맨발로 울며 걸었고, 그를 따라 나섰던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었다.
아들 압살롬의 모반으로 인한 피신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심이 압살롬에게 돌아갔다는 보고를 받은 다윗은 예루살렘을 버린 채 쫓기는 신세가 된다. 다윗은 그때“나는 정처 없이 가니”(사무엘하 15:20)라고 심경을 전한다.
다윗이 걸었던 길은 고통과 슬픔의 길이었고 이때가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으리라. 아들에게 쫓겨 정처 없이 나선 길, 그 길에서 그는 밧세바 사건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우리도 이렇게 인생길을 걷는다. 널찍한 평지 대로도 있지만 골짜기와 돌짝 산길도 오르고 길을 잃기도 한다. 우리가 걷는 신앙여정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목표와 방향에 대한 눈이 열려지지 않으면 항상 자기 한계 속에서 제자리를 돌 수밖에 없다.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많은 목회자들이 타성에 젖어 다람쥐 쳇바퀴 도는듯한 목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만 생각해 본다.
하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자신감을 가지고 소신대로 목회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가끔 휴식과 새 출발의 기회를 만들어 새롭게 자신의 지식과 영성을 충전한 후 다시금 새로운 각오로 목회에 임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 목회는 생명력을 잃지 않고 항상 능력 있는 사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사막을 걷고 있는 그대여 주님만을 바라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