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수고를 사용하시는 하나님

박종우목사 (실버데일 동산교회)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요한복음 2장9절)

크리스천라이프 발행이 자그만치 12년 동안의 300호입니다.이 의미를 누가 가장 잘 알까요?
몇 년 전에 저희 교회가 크리스천라이프 사무실 앞에서 같이 지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녁 늦게 교회를 들어가노라면, 신문사 사무실 불이 켜져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합니다.

어스름하게 문짝으로 보이는 실루엣은 라면 같은 것을 끓여 먹고 분주히 원고를 정리하는 모습니다. 정말 폼나게 일하는 것 같더라고요. 저희 교회도 교회박스광고를 내었는데 광고비를 달라고 부탁합니다. 어렵다는 거지요.

그래요. 이렇게 어렵게 꾸려온 신문입니다. 그런데 이 신문이 자그만치 300호라지 뭡니까? 대단하지 않아요? 오클랜드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 다반사인데, 아무 영리도 없는 신문사가 그래도 뭔가 주의 일을 해 보겠다고 아둥바둥대며 꾸려온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부분에서 이렇게 우리의 수고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오늘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사건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를 보세요.
아시겠지만 혼인잔치가 벌어졌는데 포도주가 떨어진 겁니다. 주님께선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시고,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십니다. 하인들 입장에선 황당하지 않겠어요?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고, 잘못되면 결혼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물 항아리를 가져다 주었더니 저쪽에선 좋은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머리에 띠 두르고 이게 말이 되냐고 항의했다면, 이 항의가 잘못된 항의겠습니까? 불편한 마음으로, 입이 십리쯤 나온 모습으로 가져다 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져다 주었더니 포도주가 된겁니다.

생각해 볼 것은 그냥 주님께서 기도하시니 물 항아리가 둥둥 떠서 연회장으로 이동하고, 극상품 포도주가 되면 더 근사해 보이지 않겠어요? 사실 하인이 뭐 필요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인을 쓰셨습니다. 이어지는 성경의 말씀에 진한 감동이 있습니다.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요한복음2:9)

물 떠온 하인들은 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위로가 있습니다. 위로를 성경에서 찾는 것이 크리스천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들판에는 5,000 명이 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드린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를 통하여 많은 사람을 먹이셨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역시 어린아이가 없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이들 다 굶었을까요? 물론 주님께선 다른 방법을 사용하실 수도 있으셨을 겁니다.

하늘에 축사하시면 빵과 통닭이 뚝뚝 떨어지면 더 근사하잖아요. 그런데 어린아이의 손길을 사용하신단 말입니다(요한복음6:9). 즉, 우리를 당신의 사역에 꼭 참여시키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어린아이가 드린 물고기는 ‘옵싸리온’입니다. 물고기는 헬라어로 두 가지로 표기 되는데 ‘익소쓰’와 ‘옵싸리온’ 입니다. ‘익쏘스’는 그야말로 어부들이 고기를 잡아 팔 수 있는 가치있는 물고기입니다. ‘옵싸리온’은 잔챙이입니다.

어부들은 조업 후 이 잔챙이를 뭍으로 가지고 나와 갯가에 놓으면 가난한 서민들이 가져다가 먹습니다. 아이가 주님에게 드린 물고기는 이 상업화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생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보잘 것 없는 것 같아 보여도 주님께 드리니 엄청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요. 우리는 여러모로 주의 일을 합니다. 가치 없어 보입니까? 아니예요. 우리가 수고하는 조그만 봉사의 손길이 주님께선 결코 작다하지 않으실 것임을 알고 소망속에 진행하시면 기쁨이 배가 될 것입니다.

실로암 연못에서의 소경의 치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땅에 침을 뱉으시고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주십니다. 그때 장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게다가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시네요(요한복음9:6). 그게 지팡이 짚고 실로암까지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별 생각이 다 들겁니다.

침 들어간 진흙을 눈에 발랐다? 물론 당시 풍습에서 약간 이해되는 것도 있지만 기분이야 좋겠습니까? 장님 눈은 눈도 아니냐면서요. 앞 못보는 것도 서러운데… 오늘 일진 되게 사납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렇게 하니 눈을 떳습니다. 믿음이 있고서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도 가만히 보세요. 그냥 현장에서 주님께서 눈을 어루만지시니 소경이 앞을 보게 되었다고 하신다면 주님이 더 파워풀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렇지 않으신단 말입니다. 꼭 우리의 수고를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그러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요한복음11:39)” 인간의 수고를 쓰십니다. 사실 돌을 옮겨 놓으라 하지 아니하시고 주님께서 기도하시니 입구의 돌이 산산조각 나면서 뽀얀 먼지와 함께 나사로가 자기 몸에 감겨져 있는 수건을 스스로 풀고 나오면, 더 멋진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신단 말입니다. 게다가 나사로가 수건 동인채로 나오니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까지 하십니다.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께선 당신의 구원의 경영에 우리 인간을 꼼꼼히 사용하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마가복음에도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달리다굼” 하시면서 살리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은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마가복음5:43)” 하시잖아요? 이왕 살리실 것이면 배 불리 먹여서 살리실 것이지 왜 살려 놓으시고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라 하실까요.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원하신단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그러실까요?

우린 누구나 하나님의 능력은 믿습니다. 그런데 지혜는 못 믿는단 말이죠. 이것이 문제예요. 하나님께선 우리를 창조하시고 한 모퉁이에 그냥 던져 놓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주님의 사역을 몇몇 보면서 나를 찾으시고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차피 하실 일이라면 열심히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안 할 수는 없기에 적당히 하시면 그저 마음의 위안삼는 일밖에 되질 않아요.

아무리 큰 교회 직분자면 무엇하겠어요. 하나님께서 이 사람 모른다면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나의 작은 수고가 말씀을 통해서 보듯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보시고, 오늘도 주안에서 승리하며 일 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