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랑 은혜의 복음

황병호목사<하늘샘교회>

0
115

로마서3장16절-17절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왜 교회 나갑니까?’ 하고 물어 보면 여러 가지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친구 따라 나왔다는 사람도 있고, 요즘 마음이 편치 않아서 나왔다는 사람도 있으며 소문을 듣고 왔다는 사람도 있고 애인 만나러 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오다가다 들렀다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빚 받으려고 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나가서 복음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1. 복음은 자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말씀 드리면 나는 복음을 사랑한다고 하는 말인데 오다가다 들린 사람이 나가서 복음을 자랑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보면 정작 부끄러워해야 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우리는 부정한 출세 같은 것을 부끄러워해야 됩니다. 또 격에 맞지 않는 칭찬을 들을 때 그것도 부끄러운 것입니다. 분수에 넘치는 소비 같은 것도 사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옛말에 군자의 덕으로 수호지심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에 악을 가질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 그것을 가리켜 수호지심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인간됨이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에 겸손한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인격이 아니겠습니까?

그와는 반면에 전혀 부끄럽지 않게 생각해야 될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문제는 게으른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공부를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문제는 불성실한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부자는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이기적인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은 인간적으로 자랑할 것이 꽤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종교적으로 열심이 특심한 사람이었고 도덕적으로 한 점 흠이 없다고 할 만큼 깨끗하고 고결한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학문의 경지로 말한다고 하면 지고한 수준까지 도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이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내가 이제는 십자가만 자랑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자신 있게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경우를 보면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왜 우리가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합니까? 그것은 복음의 참 본질, 복음의 살아있는 능력, 이것을 자신이 먼저 체험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불신자에게 전하지 못하고 나타내지 못해서 우리가 오히려 복음을 부끄럽게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2. 복음은 은혜요 능력입니다.
복음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죄와 죽음과 이 악한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고 생명을 얻었다는 소식이 곧 복음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를 두 가지로 구분해 본다면, 하나는 은혜로 구원 얻는 종교이고 또 하나는 노력과 공로로 구원 얻는다고 생각하는 종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기독교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는다고 주장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는 자기 노력과 의지로 구원 얻는다고 주장하는 종교입니다. 불교는 자기 속에 욕심을 없애야 구원 얻는다고 생각하여 그 욕심을 없애기 위해서 고행을 하고 자기 육체를 학대하고 끝없는 훈련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선행이나 혹은 기도 생활을 통해서 자기를 끊임없이 연마하고 있습니다.

오직 값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종교는 기독교뿐입니다. 때문에 기독교인은 누구 앞에서도 내가 구원 얻는데 이런 일을 했노라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충성이든 봉사든 헌금이든 노력이든 그 어떤 것이든 나는 이런 것으로 구원 얻었노라는 자랑을 손톱만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2장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겸손히 고백한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것은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애를 써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수동적인 의입니다.

루터는 처음에 능동적인 의라고 생각하여 온갖 고생을 다하며 몸에 고통을 가하면서 이 의를 이루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성 베드로 사원을 무릎으로 기어올라가기까지 했지만, 이 의를 이루지 못하여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 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하나님의 의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능동적인 의가 아니라 수동적인 의임을 깨닫고,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발견한 후에 성경 말씀이 이제 더 이상 고생이 아니라, 빛과 기쁨과 평화의 책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져서도 희망을 갖는 것은 이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수동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죄인 된 나에게 쏟아 부으시는 의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믿음으로, 철두철미하게 오직 믿음으로, 삶의 시작과 끝까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그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갈림길에서도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그 약속을 붙잡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찬송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크신 은혜가 얼마나 불타듯 믿어집니까? 이 세상의 권력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얼마나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의 의에 근거해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전혀 흔들림이 없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한 자로서 담대하게 이 세상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황병호목사<하늘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