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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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랜드 시티 근처의 Kingsland와 Sandringham 사이 어디쯤에 ‘Crave’라는 카페가 있다. 2년전 카페에서 파티를 열어 찾아가게 되었다. 로컬들을 초대하는 자리였지만 필자의 친구가 초대해서 찾아간 곳에는 그 지역 근방에 카페를 자주 찾아오는 이들부터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과 함께 매우 다양한 인종들이 어우러진 다민족 축제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곳곳에 노숙자들도 있었다. 더욱이 흥분된 것은, 준비하고 있던 통돼지 요리를 누구에게나 아낌없이 잘라서 나눠주던 그들이 바로‘교회’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말속에서 커뮤니티, 네이버와 같은 단어들이 쉽게, 자주 들려지곤 했다.

Crave 이야기
Crave 카페는 침례교단 신학과정을 마친 목사들이 함께 ‘10km반경에 있는 이들은 모두 이웃이다’는 비전을 가지고 이웃 섬기기와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과 친한 친구되기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섬김이야 말로 참으로 소외된 이들을 어색하거나, 심지어는 민망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소개하는 그러한 자리였으리라 확신한다. 술과 마약과 욕설과 언어폭력과 물리적 폭력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초대에 겨우 응하여 나온 자리에 이보다 더 확실한 심리상담은 없을 것이다.

브리티쉬 슈트를 잘 차려 입은 상담사들의 30분, 50분 진료상담보다 어쩌면 더 효과적인 치유가 일어날 수도 있는 자리이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근거한 섬김을 통한 회복이기 때문이다. ‘선교적 사랑’은 그렇게 시작된다. 바로 사랑하는 이들이 하는 선교이다.

선교적인 사랑, 사랑으로 하는 선교
Crave 카페(담당 Nigel Cottle)를 알게 된지 2년, 지금도 종종 찾아간다. 주일은 매우 조촐하게 예배를 드리고 주중 사역이 사업과 업무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매우 활발하게 드려지고 있다. 카페의 담당자 중 한 분인 그레이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브레드엔젬에 나와서 노래를 해줄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커뮤티니를 위한 작은 연주회와 같은 기획들이 다양하게 준비되고 있다.

연주자들과 밴드 혹은 그림 전시회도 주선하는, 어쩌면 매우 일반적인 이 카페에서는 헌금의 다른 형태로 모금을 하고 이를 사회와 로컬 커뮤니티에 환원하는 방식으로 교회 안의 헌금이 아닌, Crave에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는 헌금’을 하게 한다. 이는 카페의 번영을 위해서가 아닌 지역사회의 이웃들에게 환원하려는 것이 그들의 최종 목적이다.

주변에 항상 있는 가난하고 눌린 자, 억울한 자 모두를 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선교적인 차원에서 이 카페라고 하는 기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종교적 뉘앙스를 띄지는 않는다. 이렇듯 선교적인 나눔과 섬김은 행위적인 종교사역을 넘어선 ‘들음에서 시작’ 되고, ‘사랑’하는 것에 집중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매우 성경적이며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에 사역전부가 녹아져 있다.

사랑하는 것, 말을 멈추는 것
살아가면서 말하기를 멈추고 더 들어야 하는 이유는 사랑을 하기에 앞서서 그들을 아는 만큼 이해할 수 있고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쩌면 성취감을 느끼려는 욕심일 뿐, 그들의 살아온 아픔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기 위함이 아닌 때가 많다.

따라서 ‘선교적인 사랑의 삶’을 살면서 이웃을 나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이며 강압적인 복음 메시지를 강요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매우 현실적이고 물리적이고 표면적인 것에서부터 그들의 살아온 삶의 면면들을 들여다 볼 때, 그들의 살아온 구석구석 곡절들을 듣고 그들의 이야기 속에 동화됨으로 그들을 조금 더 알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무르익으면 우리는 참된 사랑으로 예수님을 이야기 할 수 있다. 그가 사랑에 능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약자를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의 예로 십대를 지나온 많은 장성한 성인들이 십대의 시절을 쉽게 잊어버리곤 한다. 많은 부분에서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공감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십대를 살고 있는 우리네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때때로 대형교회들을 제외하고는 4%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주일학교에서, 또 사춘기를 지내고 있는 가정에서, 반항아와 문제아들이라고 낙인 찍어 버리는 사회에서 그 아이들을 대할 때 종종 본인이 십대였더라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들을 강요하는 모습이란 성인들의 청소년 이해가 참으로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또 때론 매우 종교적이며 지나친 윤리격언에만 집중하여 구도자들과 신도들을 대하는 오래된 교인들과 이를 가만히 듣고 있는 이들을 발견한다. 이뿐인가? 한인으로 뉴질랜드에 와서 지내면서 우리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방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우리는 이웃들을 돌볼 수 있는 많은 준비기반이 다져진 이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타 문화권을 이해하고 사랑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인 듯 보인다. 그리고 쉽게 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필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또한 사랑하지 않으면서 전하는 모든 복음은 거짓된 복음이다.

그리고 복음 전하기
한 사람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그, 혹은 그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해야만 한다. Crave의 15명의 Collectives가 그렇게 많은 이웃들과 로컬들에게 선교적 관점으로 카페를 운영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개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이유들로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예수님의 말씀 중,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와 야보고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바울의 ‘믿음, 소망, 사랑 중의 최고의 가치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최선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곧‘사랑’이라는 복음의 핵심가치는 마치 옛 고사성어의 문일지십(聞一知十)이라는 말과 같아 보인다.

‘사랑은 단순하게 보여도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니 하나를 알면 열을 깨닫는 것에서 더욱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저 아는 것에 멈춰선 그런 정적인 앎이 아니라, 실천이 강력하게 따라야 하는 동적인 앎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를 알면 열을 행하고 온몸으로 깨닫는다는 말이다.

물론 한 가지 아는 것만으로 사랑하여도 그것 또한 사랑인데, 우리는 알아도 하지 않는 것들이 많으니 십자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 나아가는 것이 가장 심오한 사랑이라 할 때 그 단순한 하나의 사랑도 하지 못하니 그리스도의 사랑이야 오죽하겠는가?

선교적 사랑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나 순례자의 길을 걷는 신앙인들과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은 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동양의 철학가들을 뛰어넘고 이 땅 곳곳에 가득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가고자 하는 천성의 성도들로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이 도전과 열정은 행복한 것이 아닌가! 이 선교적 사랑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오 주님,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만 가지 이유들과 우리 주변의 예와 일화들을 늘어놓는 것을 멈추게 하시고, 지금 사랑하도록 우리 심령에 말씀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가는 곳곳마다 피어나게 어린아이와 노인과 과부와 소외 당하고 외면당한 연약한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따뜻한 커피 한잔, 차 한잔 권해주며 그들의 눈물을 가만히 닦아주게 하옵소서. 오 주 예수님, 주님 마음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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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운
레이드로칼리지와 감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세인트폴 교회에서 지원사역하며, 연재하는 상반기 동안에는 세계의 다음세대 리더 만나 선교와 교회에 대한 주제를 나누고, 하반기에는 한인 차세대 리더 만나 한인사회와 다민족 사역 동기와 환경 그리고 어려움과 열매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독자들과 진솔하게 나누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