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이민으로 뉴질랜드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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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의 마지막 항구는 리틀턴(Lyttelton)이었으며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에서 가까운 곳이다. 리틀턴 항에도 공교롭게 7일 동안 정박을 했다.

리틀턴에 정박하여 하역하는 동안 그곳 선원회관의 주선으로 서독의 화객선(화물선으로써 소수의 여객을 승선시키는 선박) 선원들과 축구시합을 하게 되었다.

서독 선원들은 유니폼을 입고 축구화를 신은 정예 팀이었으나 한국 선원 팀은 러닝이나 남방셔츠를 입고 신발은 작업화가 아니면 운동화를 신었다. 서독과 한국의 국제축구대회의 모습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전반전 30분, 휴식 15분, 후반전 30분의 경기 결과는 6 : 1로 서독 팀의 승리로 끝났다.

한국 선원 팀이 한 골을 얻게 된 것도 서독 팀의 골키퍼가 한국 선원이 찬 볼이 자신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가도록 도와주어 골인된 것이었다. 서독과의 국제경기가 끝난 다음, 선내의 부서별로 축구 시합을 하며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다리가 너무 아파 걸음을 잘 걷지 못했으며 선내에 있는 많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비명이 저절로 나왔다. 다리가 아파 3일 동안이나 고생을 했다.

오후의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리틀턴 항을 출항하여 호주로 향하면서 멀어져 가는 뉴질랜드를 바라보며 아름답고 평화로운 뉴질랜드와 그동안 뉴질랜드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즐거웠던 시간을 추억으로 돌리며 다시 오고 싶은 나라로 마음속에 새기게 되었다.

두 번째의 뉴질랜드 방문은 일본의 Eastern Shipping Co. 소속 선박인 Oriental Morn 호의 삼등항해사로 승선할 때였다.

1969년 12월 초에 타우랑가(Tauranga) 항(당시는 마운트 망가누이 Mount Maunganui)에 입항하여 8일 동안 일본으로 운송할 원목을 적재했다.

그 당시 타우랑가 항은 외항선 2척이 겨우 댈 정도의 부두시설이 전부였다. 선원회관도 없어 선원들은 일과가 끝난 다음 갈 곳이 별로 없었다.

나는 일본을 출항할 때 오클랜드의 친구에게 본선의 뉴질랜드 입항 소식을 전했었다. 입항하자마자 에이전트(Agent)가 오클랜드 친구의 전보를 가지고 왔다. 자기 집을 방문할 수가 없으면 자기들이 틈을 내어 타우랑가로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오클랜드에 갈 일이 생겼다는 하역회사의 중장비 운전기사의 도움으로 친구 집을 방문하여 1박 2일 동안 함께 보내며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체험하게 되었다. 3살 된 아들과 1살 된 딸을 둔 그들의 가정과 행복한 삶이 너무나 부러웠다.

타우랑가 항으로 돌아온 후 중장비 운전기사의 초청을 받고 그의 집에서 저녁 대접을 받았다. 아들 아홉에 딸이 셋인 그 부부는 천주교 신자로서 임신중절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들은 마치 군대를 훈련하는 것처럼 엄격했지만 자녀들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다.

본선이 출항하기 전날 밤 중장비 운전기사는 다섯 살과 여섯 살 된 두 딸을 데리고 본선을 찾아와 두 딸이 정성 들여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며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Merry Christmas!” 라고 했다.

너무나 기쁘고 고마웠다. 정성이 담긴 선물이 이토록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것인가! 나는 두 딸에게 학용품을 선물로 주었다.

평화로운 나라에서 가족이 연합하여 화평을 누리며 살아가는 그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마음속에 다시 그려 보며 마운트 망가누이 (Mount Maunganui) 항을 출항하였으며 많은 추억을 남기게 되었다.

1969년, 일본 오사카에서 세계 산업박람회가 열렸었다. 마침 내가 승선하던 동부 선박 회사(Eastern Shipping Co.)소속 선박인 Oriental Morn 호가 오사카 항에 입항하게 되어 산업박람회를 구경하게 되었다.

여러 나라 전시관을 둘러보고 난 다음 캐나다 이민을 신청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신청서를 작성하여 우송한 지 2달 만에 회신을 받았다. 캐나다에서 생활하고 있는 재정보증인이 있으면 다시 신청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캐나다에 재정보증인이 생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 끝에 뉴질랜드에 있는 친구에게 문의해 보기로 하였다.

1965년, 오클랜드에 입항하여 교회에서 알게 된 뉴질랜드 친구와 5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귀게 된 젊은 부부가 있었다. 캐나다의 취업이민이 거절되자 뉴질랜드에 있는 그 친구에게 문의하게 되었다.

뉴질랜드 친구가 보내온 이민신청서를 기재하여 선박 사관 취업이민을 신청하게 되었으며 회신은 약 2개월 후에 받게 되었다. 회신의 내용은 “취업에 해당되는 사항이 없음”이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다음 선박 사관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뉴질랜드에서 5명의 선박 사관을 취업이민으로 외국에서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그중의 한 사람으로 선택되어 이민허가를 받게 된 것이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이민수속 절차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상상을 초월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았으며 중국과도 국교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편의취적선에 배를 탔다고 해도 중국에 입항하게 되면 한국 선원을 교체하는 그런 시대였다.

뉴질랜드 친구는 1973년 12월 총선에서 국회의원의 당선 되었으며 재정보증과 대리인의 역할까지 모두 감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뉴질랜드 대사관에 팩스로 연락하여(당시에는 팩스가 가장 빠른 통신 수단이었음) 우리들의 이민수속을 도와 줄 것을 부탁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보사부를 찾아가 담당자를 만났다. 그러나 뉴질랜드에는 이민이 되지 않는 나라라고 했으며 호주와 같이 백호주의를 부르짖는 나라라고 했다. 이렇게 민간차원의 힘으로 어렵게 이민허가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뉴질랜드의 취업이민허가서와 고용 계약서를 보여 주었다.

그 서류를 검토한 담당자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어 보사부의 이주 허가를 받게 되었으며, 외무부 여권과에서 여권을 발급받게 되어 출국하기까지 6개월의 세월이 흐르게 되었다. 뉴질랜드로 떠날 때 동생 란이 ‘두 분 가시는 곳’ 이라는 시를 주었다.

두 분 가시는 곳/ 언제나 기쁨과 웃음이 있으시길//멀고 먼 꿈의 나라에서/ 여태 이루지 못했던 꿈/ 이루셔요// 오빠. 뻐꾸기/ 우는 고향을 잊으시지 마십시오/ 어릴 쩍 오빠의 생각이/ 이 바쁜 아침 시간에 필름처럼 스쳐, 스쳐 가는 군요/ 빨강 우단 구두는/ 지금껏 제 맘에 남아있는/ 오빠 생각// 두 분 안녕히 가셔요/ 또 만날 수 있는 날이 있겠죠. 1974.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