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직업

박성열 목사<예수찬양교회>

15

영화 <극한 직업>의 관객이, 개봉한지 한 달도 안 돼서 1,000만을 넘었답니다.

‘닭을 잡을 것인가 범인을 잡을 것인가’ 좀 뻔한 코미디 영화 카피로도 1,000만을 넘긴 것을 보면서, 아이들 따라 극장에 가볼까 생각 해 봅니다.

작년 8월, 미주 크리스천 투데이에 올라온 ‘목사님들께 많은 질병?’이라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용을 추려보면 이렇습니다. 목사님들이 가지고 있는 지병 중 ‘비 알코올성 지방간’이 많다고 합니다. ‘뭐라? 지방간? 과도한 음주로 인한 결과 아냐?’ 이런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알고 보니 담배와 술을 금기시하는 목사님들이 주로 사탕 또는 껌, 때론 군것질 등을 기호식품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네요.

이 과정에서 과당 섭취가 늘어나 지방간을 앓을 우려가 높다는 것입니다. 아참, 일반적으로 비 알코올성 지방간 질환의 주요 원인은 과도한 ‘과당’ 섭취랍니다.

또한 안면 마비 역시 목회자들 사이에서 말하지 못하는 주요한 지병 중 하나랍니다. 많은 목회자 부부가 공통으로 앓고 있는 지병이 안면 마비라네요.

말씀 준비에 따른 스트레스, 교회 내 성도와의 불화 등으로 심리적으로 편치 않은 상태가 이어지면 이것이 혈류량 증가로 이어져 목뼈 신경을 압박하는 거죠.

또 하나,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슴 통증’도 있습니다. 목회자는 늘 기도하기 위해 몸을 수그리는 자세를 주로 취합니다. 몸을 웅크리는 자세를 자주 하다 보면 목등뼈 등에 압박이 이어지고 이것이 신경 압박으로 이어져 가슴 통증 등으로 연결된답니다.

그런데 이 정도라면 목사직뿐만 아니라, 누구든 한 직종에서 오랫동안 일하시는 분들에게 있을 수 있는 직업병이니 ‘극한 직업’에 명함 내밀기는 좀 그런가요?

그래도 제겐 목회가 힘든 게 사실입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 한 손에는 성도의 손을 잡고 서로를 연결해 주는 일이 목회라고 한다면 목회는 정녕 <극한 직업>입니다.

목회의 고통은 ‘닭을 잡을 것인가 범인을 잡을 것인가’와 같이 합리와 불합리의 갈등 같습니다.

그분들이 다른데 갈까 봐 두 손으로 그분들 발꿈치 잡고 늘어지다 보면 정작 하나님을 놓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건 아니지 싶어 하나님 붙잡다 보면 어느 사이 그분들은 얼씨구나! 하고 사라져버립니다.

둘 다 잡으려다 보니 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에 하루도 견디기도 힘듭니다.

더구나 그나마 서로를 위로해 줄 동병상련의 목회자들끼리도 겉으로는 서로 웃으면서도, 진심으로 그분의 목회에 부흥을 비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현실에 자괴감도 느낍니다.

그래서 닭도 못 잡고, 범인도 못 잡고 우왕좌왕 수년을 보냈더니 손에 남은 것은 직업병이었습니다.

또 하나 더, 전보다 과자를 더 자주 손에 쥐고 있는 것. 한국식품점에서 과자 한 보따리 사 들고 나오면 차마 피하지 못한 지인이 멋쩍게 묻습니다, 다 알면서.

‘아이들이 과자 좋아하나 봐요?’

그럼 이젠 소심하게라도 대답을 툭 합니다.
‘제가 먹으려구요.’

이번 2월이면 교회 창립 12년째입니다. 그래서 12년을 버텨오게 만든 것이 뭔지 생각해 보기도하고, 또 버틴 것이 과연 잘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도 반문합니다. 목사직이 아니었다면 지금 뭐 했을까도 생각해보게 되네요.

그런데 딱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매일 매 순간 퍼부어주신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가정을 붙드셨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아내와 자녀들은 싫은 내색 없이, 오히려 목회의 동역자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를 붙드셨습니다. 성도들이 하나같이 한 마음으로 철없는 목사를 위해 기도하고, 한 뜻으로 교회를 세워갑니다.

유람선과 구명선이 있다면 교회는 구명선 이어야 합니다. 유람선 교회 탓할 맘 없습니다. 자칫 구명선 개조하여 유람선 만들까 봐 걱정해야 할 판에 무슨 남 탓입니까? 그래서겠죠. 하나님의 은혜로 붙들려 온 지난 12년을 돌아보며 앞으로 좀 더 구명선 사역에 집중하기로 다짐해봅니다.

목회가 누굴 붙잡는 것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붙잡히는 것이었습니다. 버티며 누굴 붙잡는 순간 계속 실패와 좌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버텨가며 나를 붙잡아 오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을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내가 버틴 게 아니라, 하나님이 버티셨네’

창세기 32장 1절에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그 동안 이 구절이 입에서 착착 감기지 않아 어색했습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을 그가 만난지라’이러면 입에서 술술 잘 읽혀집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야곱’이 주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가 주어였습니다. 하나님이 사자들이 야곱을 만난 것입니다.

32장 24절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여기서도 주최자가 야곱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어떤 사람’이 주최자에요.

형 발꿈치 붙들고 태어난 야곱의 인생은 가련합니다. 그는 형에게 돌아갈 복을 붙들다가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것도 아닌가 하여 사랑하는 한 여자 라헬을 붙들고 살았는데 원치 않는 다른 아내 셋을 두며 매일 콩가루 집안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 사닥다리 꿈으로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마하나임으로 그를 만나시고, 얍복나루에서는 ‘어떤 사람’으로 야곱에게 다가가 새벽동이 트기까지 그를 붙잡고 씨름을 하십니다.

어쩔 수없이 다리를 절게 된 야곱은 그를 붙드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대하게 됩니다. 브니엘의 아침이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잡기만하고 살아온 야곱의 삶은 고통이었습니다. <극한 직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잡힌 바 되었을 때 그의 삶은 극한 고통이 아니라 망극한 감동이었습니다.

술수, 잔머리의 대가 야곱은 형을 피하려고 가장 뒤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브니엘의 아침, 비록 다리는 절었지만 형을 만나기 위해 이제는 맨 앞에 섰습니다.

그는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드는 사람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내가 사람을 붙들고 하나님을 붙드는 목회는 분명 힘들고 고통스러운 <극한 직업>입니다. 코미디로 시작했는데 ‘닭도 못 잡고 범인도 못 잡는’ 비극으로 종결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잡힌바 된 목회는 <망극한 직업>임에 틀림없습니다. 비극이 아니라 해피엔딩이겠죠.

그렇게 앞으로도 하나님께 붙들려 <성은이 망극한 직업>의 길을 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