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
요한복음의 ‘표적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게 하는 수단으로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단순히 기적이나 이적들로 대치될 수 없는 특별한 것으로, 일어난 놀라운 일보다는 사람들을 예수의 신적 기원과 존재를 밝히는 정체성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려고 중요하게 사용된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곱 번의 표적 사건은 다음과 같다.
1) 물로 포도주를 만든 표적(요 2:1-12)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표적(요 4:46-54)
3)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치유 표적(요 5:1-16)
4) 5,000명의 무리를 먹이신 표적(요 6:1-15)
5) 물 위를 걸으신 표적(요 6:16-21)
6) 날 때부터 맹인인 청년을 고친 표적(요 9:1-41)
7) 나사로 부활 표적(요 11:1-44)
위의 표적들은 예수를 대표적으로 ‘생명과 영광’으로 귀결시킨다. 갈릴리 가나에서의 표적이 ‘생명을 풍성케 하는 것’이었다면,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표적은 ‘생명의 구원’을 강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치유 표적, 맹인으로 태어난 청년을 고치신 표적, 나사로 부활 표적은 새로운 생명의 삶을 보증하는 것이고, 무리를 먹이신 표적에서는 예수가 ‘생명의 떡’ 그 자체임을 말하고 있다. 한편, 갈릴리 가나에서의 표적이나 맹인으로 태어난 청년을 고치신 표적, 그리고 나사로 부활 표적에서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아들의 영광이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
이렇게 드러난 예수 안의 생명과 영광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밝힘으로써 사람들에게 예수는 ‘믿음’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표적에서 예수는 생명과 영광 안에서 구원자이고, 모든 표적은 결국 예수의 인격을 드러내는 계시적 성격을 갖는다.
‘표적’이라는 단어의 배경은 구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4장 8절에 두 번에 걸쳐 ‘표적’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여기서 표적은, 모세가 이집트의 왕과 히브리 민족에게 갈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셨음을 보증하는 기적으로써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고, 자기 손에 악성 피부병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의 표적은 모세에게 ‘신적 정당성(divine authority)’을 부여하는 통로이다. 따라서 구약성서에서 표적이란 어떤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이 보낸 자(the one who God has sent)’라는 것을 증명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하는 말이나 행동의 신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행하는 기적이다. 나사로 부활 표적에서도 예수는 자신을 분명하게 ‘하나님이 보내신 자’(요 11:42)로 규정한다.
요한복음 저자는 스스로가 요 20:31에서 무수한 다른 표적 중에서 오직 일부만을 기록했다고 강조한다. 이는 요한복음서 안에도 우리가 미처 표적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들도 표적일 수 있고, 또한 어떤 점에서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모든 구체적인 말과 행동, 등장하는 모든 사건이나 배경들 하나하나가 표적이라 할 수도 있다.
기적(Miracle)과 표적(Sign)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주제적인 관점에서 기적과 표적에는 차이점이 있다. 공관복음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는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이다. 때문에, 기적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하는 종말론적인 표식이었다면, 요한복음의 표적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 그리고 그의 신적 권위와 정당성을 드러내는 초월적 계시이다.
공관복음의 기적들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사탄의 지배를 제압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므로 많은 기적이 귀신 축출과 관련되고 치유 기적들도 죄 또는 악과의 연관성 속에서 묘사된다. 반면, 표적들은 사탄의 세력을 제압하거나 압도하는 것보다 예수의 신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을 더 둔다.
이것은 또 다른 차이를 불러일으키는데, 곧 ‘삶의 자세’에 대한 결단의 과제이다. 요한복음의 표적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실제 의미를 제공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현재의 요구 앞에서 결단해야 하는 도전과 숙제를 남긴다. 주어진 상징과 암시 앞에서 긍정의 결단으로 종국적으로 무엇이 강조되고, 무엇이 추구되어야 할 것인가의 물음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삶을 적극적으로 바꿀 것인지 아니면 부정의 결단으로 이전 그대로의 삶을 지속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묻는다. 그리고 그 물음의 중심에는 도전과 하나님이신 예수를 향한 ‘믿음’이 있다.
반면에 기적은 그렇지 않다. 기적의 경우에는 그 순간에만 장악되고, 압도되고, 복종하면 된다.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 통치의 위엄을 맛보기만 하면 된다. 기적의 외연에 집착하는 경탄과 경이는 찰나적 자기만족 중에 흩어지는 허망한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반면에 표적은 목격자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자극하고 도전한다. 또한, ‘믿음’에 대한 결단이 사람에 따라 긍정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혹은 부정적 거부의 표현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기적이 절대적이라면 표적은 상대적이다.
상징(Symbol)으로써의 표적(Sign)은 미래를 지시하고 반드시 실현될 일의 선취적 약속으로 ‘도래할 종말론(imminent eschatology)’의 입장이다. 동시에 그 미래의 실재를 현재로 끌어당기는 역할로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적 측면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예수를 영원한 생명의 현재적 수여자로 제시함으로써 예수 안에서 미래의 종말론적 구원이 현재 확증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공관복음에서의 생명은 미래적이지만, 요한복음에서의 생명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이미 누리고 있는 현재의 생명이다.
나사로의 표적(요 11:1-44)
나사로 부활 표적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곱 개의 표적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제시되는 표적으로, 모든 표적의 절정(climax)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대한 지극한 암시와 상징 때문이다. 계시의 말씀 선포(요 11:26-27)와 부활 표적의 실행(요 11:43-44)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구원은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나사로 부활 표적에서의 대표적이며 함축적인 케리그마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1:25)이다. 이 케리그마의 수용은 예수를 신적 본질로서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나사로야 밖으로 나오너라”(요 11:43)와 같은 말씀을 수용하는 믿음은 필연적·내재적으로 인정, 신뢰, 순종하는 다른 믿음의 요소들도 포함한다.
요한은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오래된 병자를 치유하신 하나님으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분이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영원한 생명으로 귀착됨을 보여줌으로 그 어느 표적보다 장엄한 모습으로 예수의 공생애를 결론짓는다. 또한 이어지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의 연관성이 상징과 암시로 내포되어 죽음을 넘어서는 신적 권능의 관점에서 ‘영광’이 중요한 주제가 된다.
요한복음의 일곱 표적 중에서 표적 바로 직후에 “유대인들 중의 많은 사람이”(요 11:45)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은 나사로 부활 표적이 유일하다. 또한, 성전 정화 사건이 예수 수난의 직접적 원인으로 제시되는 공관복음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만 이 사건이 예수의 고난 시작의 직접적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는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
나사로 부활 이야기는 예수 자신의 부활을 위한 수난과 죽음을 나사로로 대표되는 모든 사람의 경험에 연관시키는 일종의 ‘예표’이다. 나사로 부활 사건은 과거 어느 시점에 나사로라는 한 사람만이 경험한 이적이 아니라, 복음서를 읽는 모든 독자의 현재 속에서 공유되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표적이다. 그리스도는 언제, 어디서나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통하여 나사로에게 이루어졌던 동일한 일을 행하실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나사로는 예수가 말하는 믿음을 가졌었기에 죽었어도 살아나는 일을 경험했는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왕의 신하의 아들이나 나사로가 사건이 일어나는 당시에 ‘예수가 요구하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가?’에 의문을 제기해 보면, 나사로를 포함 부활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표적이 일어나기까지는 예수의 신적 정체성은 물론 신적 권능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즉 그들은 나사로의 병과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기 위한”(요 11:4)것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예수는 끊임없이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임을, 곧 자신이 하나님임을 드러내면서 사람들이 그 진리를 알기를 원하는 마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38절에서 예수의 내적 분노인 “비통히 여기시며”를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예수의 신적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임을 보여준다. 결국 영원한 생명의 보장은 인간의 믿음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주권 의지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