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자주 포도나무로 비유하곤 하였는데(시편 80:8, 이사야 5:1-7, 예레미야 2:21, 에스겔 15:1-5),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가장 좋은 종자를 파종하고 농부의 극진한 보살핌이 있었는데도 먹을 수 없는 열매를 맺는 경우로 묘사할 때가 많다. 열매를 제대로 맺으려면 줄기가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풍성하고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참 포도나무’이시다.
왜 포도나무인가?
포도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의 농산물 중 하나로, 풍요와 축복의 상징이면서(신명기 8:7, 8), 자비의 상징(레위기 19:10)이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막대기에 꿰어 메고 왔던 포도는 가나안 땅의 풍요를 보여주는 주요한 징표이기도 했다(민수기 13: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신명기 8:7,8).
포도나무의 또 한 가지 특징은 포도나무 자체는 보잘것없다는 것이다. 대추나무와 같이 열매를 맺는 나무들이 종종 목재로도 쓰이지만, 포도나무는 비틀리고 구부러져 목재로써 전혀 사용할 수 없다. 단지 화목 정도로만 사용할 수 있을 뿐으로, 열매를 맺을 때만 그 가치를 발할 수 있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하지 아니하였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에스겔 15:2-5).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고 실패했던 이스라엘을 대신해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포도나무가 되셨다. 참 포도나무의 ‘참’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디노스’는 ‘실제의’, ‘진짜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포도나무로서의 이스라엘이 그림자 또는 모조품의 역할이었던데 비해 예수 그리스도는 열매를 제대로 맺을 수 있는 실제의 포도나무이시다. 농부이신 하나님의 보살핌과 사랑과 능력을 제대로 가지에 전달할 수 있는 줄기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참 포도나무의 가지이다. 열매는 가지에 매달려 자라게 된다. 하지만 가지는 줄기에 단단히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줄기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는 어떤 영양도 공급받지 못하고 말라져 죽을 뿐이다.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열매를 맺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
여기서 ‘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어떤 계명을 말하는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사랑에 있어서 우리는,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없지만,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해 빛을 내는 달과 같은 존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요,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자이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15:1, 5, 10, 12).
열매는 무엇인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살펴 보았다. 열매를 많이 맺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인생의 참된 목적대로 사는 삶이 ‘열매를 맺는 삶’이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에라야 가치가 있듯이.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한복음 15:8)
열매는 요한복음 15장의 주제로 볼 때 ‘사랑’이다. 이 ‘사랑’은 율법이 추구하는 본질이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축약할 수 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로마서 13:9, 10)
여기서 더 나아가서, 태양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일곱 색깔로 나누이듯, ‘사랑’도 일곱 색깔과 같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사야 5장의 ‘포도원 지기의 노래’를 참고하면 이 ‘사랑’이 프리즘을 통과하여 보여주는 구체적인 스펙트럼을 볼 수 있다.
유다의 멸망을 경고했던 이사야 선지자는‘그들이 맺어야 할‘사랑’의 구체적인 열매가‘정의(justice)와 공의(righteousness)’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정의와 공의’ 대신 포학과 부르짖음을 초래했다.
‘정의’와 ‘공의’는 주로 함께 사용될 때가 많은 단어인데 하나님의 속성이면서 율법의 저변을 흐르는 큰 줄기이다. 사람을 학연, 지연으로 묶어 차별하지 않고, 신분의 고하로 나누지 않는 ‘공평함’과 ‘나눔’이 ‘정의와 공의’이며, 사랑의 스펙트럼인 동시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맺어야 하는 열매이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히:미쉬파트)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히:미쓰파흐)이요 그들에게 공의(히:체다카)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히:짜아카)이었도다”(이사야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