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안목으로 보는 안락사

나명균 목사<조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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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 선택할 권리가 아니라 죽어야만 하는 의무로 돌변할 수도
현재 뉴질랜드에서는 안락사와 조력 자살(불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의료진으로부터 약물을 처방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을 법으로 허용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생명 경시 풍조로부터 취약한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여러분의 지대한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341호, 8월 12일 참조)”는 기사를 게재했다.

또한, 342호(8월 26일 참조)에서는 김아람 의사(정신 건강 의학과 전문의)의 뉴질랜드 안락사 법안에 대한 구두 의견으로“크리스천으로서 가지는 신학적, 성경적 반대에 대한 이유를 포함해 더 많은 쟁점들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의사로서의 – 특히 정신 건강 의학과 전문의로서의- 시각과 이민자로서의 문화적 배경을 요점으로 하여 글을 작성했음”을 알려주었다.

이번호에서는 크리스천으로서“성경적 안목으로 보는 안락사”에 대한 기사를 실는다. <편집자 주>

목회 초년병의 혼동
나의 목회 초년병시절, 목사안수를 받고 얼마지나지 않아 다급하게 병원심방을 가게 되었다. 병실에 들어서자 마자 들려오는 사람들의 울음소리, 누군가의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혼란스럽게 들렸다.

심방요청을 했던 며느리는 시부의 임종전에라도 목사의 기도를 필요로 했지만, 다른 가족들은 임종을 앞둔 분과 단 1분1초라도 더 있기를 원하며, 그것 조차도 원치 않는 것이면서도 가능하면 가장 짧게 해달라고 요청을 해왔다.

정말 짧게 기도를 마치고 병실을 나오자 병원 복도에서는 사위와 의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도무지 못보겠으니 어떻게든 편안하게 갈 수 있도록 의료적인 행위를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었다. 과연 환자의 고통은 죽고자 하는 고통이었는지, 살고싶어 하는 고통이었는지가 참 궁금했다.

안락사, 세계적 추세
크리스천라이프가 앞서 게재한 바에서 알려진 것처럼, 지금 뉴질랜드는 안락사 법안 문제로 크게 쟁점화되고 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사는 뉴질랜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스위스에 있는 안락사 기구인 디그니타스의 자료를 보면,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안락사를 신청한 사람은 96개국에서 7,764명에 이른다.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나라는 2002년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에서 전 국민의 4%가 안락사로 생명을 마감한다고 한다.

조력자살 방식이 아니라 독극물을 의사가 직접 주입해 신청자의 사망을 유도하는 적극적 안락사만의 수치가 그렇다. 이러한 적극적 안락사뿐만 아니라, 조력자살, 소극적 안락사를 포함한다면, 안락사 문제로 사망에 이르는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 주장도
요즘은 ‘안락사’라는 용어는 벌써 구시대 언어가 되었다. 우리가 말하는 안락사라는 표현은 이미 ‘존엄사’라는 단어를 넘어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이라는 용어로 더욱 구체화되어 왔다.

이것은 안락사가 그만큼 역사성을 가졌다는 뜻이다. 어쨌든 안락사(Euthanasia)라는 말은 헬라어의‘좋은(eu)’과‘죽음(thanatos)’의 합성어로 고통이 없는 편안한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자비로운 살인(Mercy killing)으로도 불린다. 사생활을 추구할 수 있는 헌법상의 권리에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포함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안락사 옹호자들은 말기 질병이나 심각한 우울증으로 고통받기보다는 의학의 도움을 받아, 혹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 한 사람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법안으로 반대하는 이유
지난 인류 역사 속에서 어떤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면, 대중들의 태도는 아주 분명하게 나타났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낙태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1929년 유아생명(보존) 법령에서‘어머니의 생명을 구하려는 의도로 충실하게 행할 때에는’ 어떠한 행동도 처벌하지 않을 것이라는 규정과 1966년 데이빗 스틸이 낙태법을 입안한 전후의 통계를 보면 가히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법안이 입안되기 전에는 낙태 건수가 6천여건이 보고 되었지만, 2002년에는 500만건이 넘는 낙태수가 보고 되었고, 현재 지구상에서는 단 1초에 1.7건의 낙태가 시행되는 현실이다.

안락사 문제에 있어서도 바로 이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안락사가 입법이 되어 현실화된다면 다양한 이유로 안락사가 행해질 것이 자명한 바, 인명경시 풍조가 가속화될 것이다. 장애인과 노인 같은 사회, 경제적 약자들은 자신이 원치 않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아니라 죽어야만 하는 의무로 돌변하게 될지도 모른다.

안락사에 대한 성경적 근거
성경에서 안락사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씀하는 바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혹 안락사를 긍정적으로 희미하게 나마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성경구절이 있다.

구약성경 잠언 31:6에서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줄지어다”라는 말씀이다. 고대인들은 흔히 취하게 하는 독한 술에 여러가지 마취성 식물들의 혼합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통하여 치명적인 고통을 둔화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잠언에서 말씀하는 바는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 양식을 근거로 말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뜻으로는 볼 수 없다.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의 군병들도 십자가 형벌을 받는 자들에게 이와같은 것을 제공하였다. 마태복음 27:34을 보면, 골고다 언덕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에게도 쓸개를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로마 군병들이 주는 이러한 것을 마시기를 거절하셨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믿음을 강하게 간직하기 위하여 맑은 정신을 갈망하셨던 것이다.

성경적 인간론에 대한 이해
‘안락사’ 뿐만 아니라, 이를 전략적으로 미화한 ‘존엄사’, 나아가 ‘무의미한 진료 중단’ 등에서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인간을 생물학적 생명(the biological life)의 의미로만 보려는 것에 기인한다. 이러한 사상은 성경적 인간론의 관점에서 보면, 영혼의 문제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창세기 2:7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말씀을 비롯하여 성경은 우리 인간에게 허락하신 영혼을 통하여 온전한 인간을 말씀하고 있다.

심지어 성경을 근거해 보면, 이 영혼의 문제는 육체가 소멸된 이후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즉 영혼은 육체가 소멸된 이후에도 의식적인 존재와 활동을 계속한다는 사실을 성경의 많은 곳에서 명확하게 증거한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바울의 서신서들에 나타나는 바울이 육신을 떠난 이후의 상태 표현, 주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그들이 행한 일을 기억한다는 요한계시록 14장의 말씀, 또한 순교자들의 영들이 하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묘사한 요한계시록 6장의 말씀들은 영혼의 의식이 분명히 살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육체적인 죽음만을 이해하려는 안락사의 문제는 전혀 성경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나온 결과이다.

생사여탈권은 오직 하나님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권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사실이다. 안락사의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권, 존엄 등의 언어로 포장된 분명한 인간의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지혜자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다.

전도서 3:1-3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이 말씀은 인간은 때에 대하여 어떠한 권한을 가지지 못하며,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이루어짐을 가르친다.

또한 누구보다도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었다고 볼 수 있는 욥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1:21).”라고 했고,“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기12:10).”고 말씀하면서 역시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으며,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생명에 관하여서도 다만 청지기의 입장에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생명의 하나님, 죽음도 극복하신 부활의 예수
창세기 2:7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거룩한 선물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선물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또 빼앗아서도 안된다. 하나님은 또한 신명기 30:19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삶과 죽음의 선택이 주어지면 “생명을 택하라”고 말씀하셨다. 안락사는 하나님의 선물을 저버리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하여 말씀할 때, 가장 먼저 말씀하시는 바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음을 기록하고, 죽을 자를 용서하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한다.

창세기 1장은 모든 피조물을 만드시고 생명을 주시는 것으로 가득하며, 로마서 4:16-17, 고린도후서 1: 8-10 등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형제들아 –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에스겔 37:4-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5-26)”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생명을 주시고 심지어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음을 증거한다. 이런 성경적 사실을 믿을진대, 죽이는 일, 죽도록 내버려 두는 일, 혹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감당하지 않겠다는 것은 명백하게 성경과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적 대안
로토루아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한 교우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 집에는 소나 양, 염소 등의 동물이 많이 있었다. 동물들이 새로 태어나는 중에 약하고 잘못되어 태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느 날에도 염소 한 마리가 약하게 태어났다. 이미 어미 염소는 자기 새끼를 포기했다. 그러나 그 교우는 그 죽어가는 염소를 살리기 위해 밤 늦게 수의사를 부르는 등,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기어이 살려냈다.

주변 사람들은 몇 십 달러면 살 수 있는 것을 수백 달러를 들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생명에 대한 귀중함을 깨달았다.

죽어가는 동물도 포기하지 않고 저렇게 살려내는데, 하물며 인간을 어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식물인간 상태이든 뇌사상태이든 가족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를 치료하고 돌보는 사람들의 고생이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싶다. 고생이 되고 돈이 든다고 포기할 수 없지 않겠는가?

감사하게도 우리 주변에는 이런 현실을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모습이 있다. 뉴질랜드 생활에서 가깝게 볼 수 있는 호스피스(hospice) 사역 영역을 이해하고 그 사역을 더 넓히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먼저 언급하고 싶다.

말기암 환자이던 나의 교우도 호스피스의 도움으로 정말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의 가족들 역시 매우 의젓하게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호스피스는 안락사와 달리 환자의 죽음을 결코 의도하지 않는다. 호스피스가 병원과 다른 것은 죽음을 대하는 것 자체에 있다. 병원에서는 모든 환자를 거의 본능적으로 살려내고자 하는 일이 진행된다.

그러므로 환자가 보고 듣는 것, 환자를 위한 주변환경은 오히려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줄 수도 있지만, 호스피스에서는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게 해주는 동시에 통증을 적절히 조절해 주며,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신앙적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호스피스에서의 특징이다. 환자들이나 건강한 사람들이나 할 것 없이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호스피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현실이기에 이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이와 더불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Well living, Well dying, Well leaving 운동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바란다.

인간은 한 평생 많은 시간을 학습하는데 사용한다. 그러나 어쩌면 인간은 정말 배웠어야 하는 ‘삶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와 ‘죽음이 무엇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 같다. 성경 속에서 가르치는 삶과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학습을 통하여 보다 가치 있는 삶과 죽음을 생각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