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 뉴질랜드군이 가장 먼저 지원하고나서
처음으로 부산에 있는 유엔묘지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 공원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유엔군 장병들을 안장하기 위해 유엔군 사령부에 의해 조성되었다. 그 뒤 이곳은 영원히 유엔 기념 묘지로 1959년 지정되었고 모든 관리를 유엔이 운영한다.
한국전쟁에 전투지원 나라는 16개국이고, 물자와 의료, 식량. 방비 등 총 63개국이 한국을 지원했다. 유엔에서 한국전쟁 뉴스가 나가자, 3일 만에 세계에서 가장 빨리 자원하여 전투지원을 돕겠다고 나선 나라가 바로 뉴질랜드였다.
6천 명이 한국전에 파병되 32명이 전사한 뉴질랜드군
인구도 적고 작은 나라인 뉴질랜드는 참으로 대단한 나라다. 뉴질랜드는 약 6 천명이 한국에 파병되었고, 이들 중 45명이 전사하였고, 79명이 상처를 입었다. 뉴질랜드는 해군 함정과 포병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주요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뉴질랜드는 한국전쟁의 성공적인 방어와 그 이후 평화 유지에 크게 이바지한 나라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이리저리 공원을 둘러보다가 나의 시선이 머무른 돌판에 뉴질랜드 전사자들의 명단을 보게 되었다. 그들의 나이는 대략 18-25세 사이였다. 유엔 공원에는 총 13개 전투국 2,300명이 안장되어 있는데, 영연방 나라 중에는 뉴질랜드 32명, 호주 281명, 영국 892명이 잠들어 있다. 저 높은 깃대 위에 펄럭이는 뉴질랜드 국기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쿵쾅쿵쾅 나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동양의 작고 불쌍한 한국에서 전쟁나 지원한 월슨
여기서 잠시 나는 1950 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의 남편 로이 윌슨의 상황을 설명하고 싶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1950 년 Mr. Wilson은 18세로 영국 군인이었다. 하나님이 버렸다는, 동양의 작고 불쌍한 나라, 코리아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자원하여 참전지원서를 내고 영국에서 출발을 기다렸는데, 웬일인지 출발 직전에 불발이 되어서 한국에 갈 수 없게 되었다.
가족과 뉴질랜드로 이민와 한국 선원 만나 도움줘
그 뒤 그의 가족들은 영국을 떠나서 뉴질랜드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어느덧 세월이 지나 한국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되었다. 그는 공무원으로 뉴질랜드의 수도인 웰링턴에 거주하게 되었다.
1970년대 초반, 한국과 뉴질랜드 양국 간의 어업협정으로 한국의 원양어선들이 뉴질랜드에 많이 들어와서 어업에 종사 하게 되었다. 한국 원양어선들이 정박하는 부두가 바로 윌슨 씨의 직장 건물 앞이었다. 그때부터 그와 한국인들과의 인연의 끈이 시작되었다. 2018 년 그가 돌아가실 때까지 거의 50 년 이상의 긴 세월 동안 한국인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호주 참전 용사회에서 벤치 기증한 것 알게 돼
우연히 나는 2024년 한국전쟁 참전 기념사업회와 인연이 되어 뉴질랜드 지역 회장 일을 맡게 되었다. 그날 이곳저곳 부산 유엔묘지를 둘러보던 중 어느덧 피곤이 몰려오고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어디 앉을 곳이 없을까… 우연히 저만치에 있는 벤치를 발견했고, 거기에 앉았다.

그 벤치 등받이에 조그맣게 새겨진 글자가 있었다. 전사자들의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고 기념하면서, 호주 참전 용사회에서 이 벤치를 기증한 것이었다. 쿵쾅쿵쾅. 또다시 나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우리도 할 수 있을까? 뉴질랜드 이름으로 가능할까?
NZ 벤치 모금 운동 중 92세 한국전 참전 용사의 후원
그로부터 한국전쟁 참전국 기념사업회에 노크하기 시작했다. 신광철UNPK 회장의 노력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유엔사무실로부터 듣고 나는 뉴질랜드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생존해 계시는 키위 참전용사를 방문하고 모금 운동의 뜻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까운 지인에게도 알렸다. 또한 대사관과 총영사관을 방문하여 나의 계획을 알렸다.
며칠 후, 매우 이른 아침, 나의 현관문을 막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누가 이렇게 일찍 약속도 없이 왔을까. 그때까지 자고 있던 나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가보았다. 문 앞에는 지미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는 참전용사로서 92 세가 넘었는데, 손수 운전을 하고 온 것이었다.

“경숙, 나는 이제 나이가 많다. 요즘도 자주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간다.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경숙이 추진하고 있는 부산 유엔 기념 공원 벤치를 빨리 해라. 나는 이제 늙어서 한국은 커녕 어디든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다. 한국전쟁에서 나는 이렇게 살아 돌아와서 결혼도 하고 사업도 하고 자녀도 두고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 하지만 그 당시 한국전쟁 시 전사한 전우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벤치가 완공되면 나에게 사진이라도 보여다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하늘나라에서 전우들을 반갑게 만날 것이다. 은행에 가기도 힘들고 조급한 마음에, 양복 주머니를 뒤져서 가져온 이 돈이라도 보태 써라. 그 대신 빨리 서둘러라. 나 죽기 전에…” 그러면서 현금 지폐를 내어놓으셨다.

나는 너무나 놀라웠고, 뭉클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부터 서둘러 모금 운동을 시작했고, 1개월 만에 목표했던 자금을 모두 마련하였다. 최대한 서두른 결과로 유엔 사무실로부터 완공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뉴질랜드 이름으로 2 개의 벤치를 기증하고 완공해
나는 다시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가까스로 뉴질랜드로 돌아오는 하루 전날에야 완공 날이 잡혔다. 유엔 사무실 직원이 우리를 맞이하고 안내를 하였다. 막 완공을 한 멋진 벤치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유엔 참전용사와 K-FORCE 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며 UNPK뉴질랜드 지회가 기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또 하나의 벤치에,
‘모든 유엔 참전용사들과 K-FORCE 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며 뉴질랜드의 로이 윌슨과 경숙 가족이 기증하였습니다.’

그날은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부산에 있는 유엔묘지 기념 공원에 뉴질랜드 이름으로 2 개의 벤치를 기증하고 완공한 날이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벅차오르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18세 월슨의 소망은 74년 지나 기증한 벤치로 이뤄내
이날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이후 벌써 74년의 세월이 흘렀다. 고인이 되신 윌슨은 한국전쟁으로 희생이 된 수많은 유엔군, 영국군, 뉴질랜드군들을 이곳 유엔묘지 벤치에서 만난 셈이었다고 할까.

이로써 1950년 18세 영국 군인이었던 윌슨은 자원하여 지원했던 6.25전쟁 참전이 불발되었지만, 74 년 만에 그의 소원은 이루어진 셈이었다. 유엔군, 영국군, 뉴질랜드군들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만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