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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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심리학자가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두 그룹의 사람들에게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어떤 한가지 일을 하고 있는 와중에 한 그룹에는 좋은 소식을, 다른 한 그룹에는 나쁜 소식을 전해주었더니 나쁜 소식을 전달받은 그룹의 소식 전파 속도가 다른 그룹에 비해 월등히 빨랐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으레 좋은 소식, 미담보다는 누군가가 잘못되었다, 실수하였다는 소식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고국으로부터 전해지는 소식도 좋은 소식보다는 안 좋은 소식을 더 많이 듣고 기억하게 되더군요.

물론 잘못된 것들은 시정을 해야 하고 개선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에 편승해 무조건 남의 잘못을 찾아내고 들춰내어 누군가를 곤란케 하는데 그 결과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들이 더러 있어 우려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명 내 보기에는 불합리고 부조리일지 모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허나 현 세대의 흐름을 보고 있자 하면, 마치 누군가가 잘못을 저질러 이슈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남의 잘못에 관심이 많습니다.

인간의 이로움을 위해 정보를 공유하려고 발달시켜온 이 정보 사회가 어쩌면 필요 이상의 정보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사회를 더 어지럽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될 정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고 난 후, 인류는 피조물이 감히 창조주의 영역을 넘보는 교만함에 노출되었습니다. 아담의 선택은 결국, 선과 악을 구분하는 절대적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선함과 악함을 판단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인류는 두 사람 이상만 만나면 다투게 되었습니다. 모두 각자의 선악의 기준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분명히 혼돈(Chaos)을 정리하셔서 질서를 잡으신 것인데 인간이 각자의 선악의 기준으로 분쟁을 일삼으니 다시 창조 이전의 상태, 즉 혼돈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거스르게 된 것이니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행하심과 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되어 하나님께 탄식을 안겨드리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상황을 보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판단으로 관계를 그르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혼돈을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정의’는 누구를 위한‘정의’일까요?

운전을 하면서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는 바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인데 감히 내가 남을 판단, 정죄하고 있으니 하나님을 대신하겠노라는 교만을 저지르고 있는 셈입니다.

제가 운전 중에 남을 판단할 때 제일 많이 쓰는 말은 아마도,‘운전을 저렇게 하다니’,‘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저렇게 하면서 어떻게 운전면허를 땄나?’이런 말들인 것 같습니다.

안 그러려고 무던히 노력하지만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이런 생각들은 쉬이 삭힐 수가 없더군요. 처음엔 누군가 내 기준으로 잘못을 저지르면 이렇게 판단하고 정죄하며 또 때로는 손가락질 했었는데요, 어느 순간인가부터 피곤이 쌓이면, 남을 욕하고 손가락질하기 위해 누군가의 실수, 잘못을 찾고 있어 소스라치게 놀라고는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제 아이가 학교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수준미달인 사람에게 모함을 당한 딸아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많이 아팠고, 얼굴도 모르는 그들이 밉고 야속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내 자녀가 억울한 일을 당하니 부모인 제 마음이 상하더라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모르는 사람일테지만 그 사람은 분명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영혼일텐데 내가 그를 정죄하고 판단한다면 하나님 마음은 어떠실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생각이 드니 누구에게 함부로 뭐라고 할 수 없겠더군요. 모두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피조물들인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심판하고 정죄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욱’하는 마음이 올라와 누군가를 욕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마다 되뇌이는 말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도 함께 사용해보았으면 하여 저만의 표현이지만 오늘 소개해 드리고자 하니 마음껏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상대방이 저지르는 저 실수는 언젠가 나도 했었던 실수이고 인간이라면 충분히 할만한 실수입니다. 그러니 그냥‘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어갈 수 있다면 굳이 내가 분을 내고 열 받으며 서로 얼굴 붉히지 않아도 되겠더군요.

“무슨 일이 있겠지”

저 또한 급한 일로 비상등을 켜고 가열차게 운전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약속시간에 늦어 운전을 조금 험하게 한 적도 있구요. 다른 사람들도 각자 다 사정이 있겠지요. ‘무슨 일이 있겠지’ 하고 이해해 주면 오히려 저들이 다치지 않고 목적지까지 잘 갈 수 있도록 중보하는 마음도 생기더라구요.

하나님께서 내 잘못을 대하실 때처럼
제가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려고 많은 것을 내려놓고 좋은 말로 잘 타이르려고 노력하지만 그래도 간혹 아이들의 반복되는 잘못 앞에서는 살짝 긴장의 끈을 놓친 채, 저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험하게 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 옆에서 아내가 저에게 이렇게 묻고는 합니다.

“당신의 잘못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대하시던가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신 것처럼 당신도 아이들에게 그렇게 대해 주시면 좋지 않을까요?”

아, 제가 장가를 잘 갔더군요. 아내가 저의 잘못된 훈육방법을 일깨워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한번도 험한 말과 험한 표정으로 윽박지르며 저의 실수를 조목조목 따져 드러내지 않으셨거든요.

마찬가지로 길에서 만나는 다른 운전자들의 실수 앞에서도 쉽게 흥분하고 정죄하며 판단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나의 실수와 잘못을 드러내시지 않으시듯 그렇게 덮어주고 이해하고 웃으며 축복해주면 어떨까요?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처럼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흐르게 되지 않을까요? 또 서로가 이 땅위에서도 천국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예수께서 간음하다 끌려온 여인의 잘못을 묻지 않으시고 용서하신 것처럼 세상 사람 모두가 남의 실수를, 드러내고 흉보는 것이 아니라, 덮어주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예수님의 방법을 흉내라도 내어볼 수 있다면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소망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도로로 달려나갑니다. 저부터 그렇게 실천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