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건국 70주년(5월)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70주년(8월)을 맞아 현대로 돌렸던 눈길을 다시 2차 유대전쟁 이후 팔레스틴 땅으로 돌려본다.
이교도 시대( ~312년)
AD 135년 바르 코크바의 반란이 진압된 후 아엘리아 카피놀리나(예루살렘)는 그 중앙에 쥬피터 신전이 세워져 있는 이교도 나라 로마제국의 한 식민지 도시가 되었다. 유대인은 공식적으로 접근이 금지 되었고, 유대교에 반대하는 그리스도교도가 점차 늘어나 로마인에게 현실적인 위협이 되어갔다. 팔레스타인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이 카이사레아(가이사랴) 해변에 살았다.
기독교 시대(312~630)
AD 306년 콘스탄티누스가 황제로 추대되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에서 제국의 패권을 놓고 막센티우스와 마지막 일전을 벌였다. 전투가 있기 전날 밤 하늘에 “빛으로 된 십자가”가 “이 신호와 함께 너는 승리할 것이다” 라는 문구와 함께 겹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것을 알고 군인들의 방패에 그리스도(크리스투스)의 첫 두 글자 키(X)와 로(P)를 그려 넣게 하였고, 다음날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그는 명실상부하게 서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권력이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고 믿었다. 그는 어머니 헬레나를 숭배했는데, 헬레나가 그리스도교 개종자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의 전쟁에서 극적으로 개종하였기 때문에 어린양 그리스도를 승리의 신으로 이해했고, 자신을 신성의 수호자로 사도들과 같은 반열에 두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와 동로마 황제 리시니우스가 밀라노에서 조약을 체결하고 밀라노 칙령을 공포하였는데, 이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고 신앙의 자유의 교회 조직의 권리를 얻게 되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를 정복하고 제국을 통일하여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제국 전체에 가르치고 적용하도록 하였다. 그는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는데, 그의 사후에 그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로 불렸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대중적 종교가 되었고, 복음서에 명확하지 않은 부분들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일어났다. “예수는 신적인 특성을 가진 인간이었는가?” 아니면 “사람의 몸 안에 거한 신이었는가?” 하는 그리스도론 Christology이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예수를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를 둘러싼 소요를 계기로 콘스탄티누스는 주교들을 니케아에 불러모아 이 문제를 해결 보게 하였고, “예수는 신인 동시에 인간이며, 성부와 본질상 하나” 라는 교리를 확립하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는 예수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수의 무덤을 발굴하고, 올리브산에 부활교회와 주기도문교회를 세우고, 10년이 걸려 성묘교회를 세웠다. 예루살렘은 수많은 순례객으로 북적대게 되었다.
362년 새로운 황제 율리아누스는 하드리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유대인 박해를 철회하고, 예루살렘과 그들의 재산을 유대인에게 돌려주었다. 유대인을 탄압하는 세금을 폐지하고 유대인들의 족장 힐렐에게 징세권과 근위대장의 직함을 주었다. 유대인들은 성전산을 되찾았고 유대인 성전 재건을 시작하여 예루살렘은 유대인이 장악하였다.
그러나 율리아누스가 65만 병력을 이끌고 페르시아를 침공한 사이인 363년 지진이 남에 따라 유대인의 성전 재건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율리아누스의 사망 후 황제가 된 요비아누스는 그리스도교를 복원시켰고 율리아누스의 모든 조치를 철회하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을 다시 금지시켰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정하고(391년)에 이를 강요하였다. 제국에는 그리스도론 논쟁으로 다시 불이 붙었는데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두 왕비인 풀케리아(양성론자)와 에우도키아(단성론자)를 중심으로 서로 갈등하고 싸웠으며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두 본성의 결합 속에서 예수는 신성도 완벽하고 인성도 완벽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전쟁, 종교, 예술을 통해 보편적인 그리스도교 제국을 완성시켰으며, 그가 예루살렘에 세운 신성모마리아교회는 순례자들의 중요한 코스가 되었고, 예루살렘은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았다.
비잔틴(동로마) 황제 마우리스가 살해당했을 때 그의 도움을 받은 적 있는 페르시아 황제 호스로 2세가 동로마를 침공해왔다. 이때 핍박 받던 안티오크와 티베리아의 유대인 2만명이 호스로 2세와 합류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점령하였다.
티투스가 성전을 파괴한지 600년 후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포로로 삼고 유대교로의 개종을 강요하였으며, 성전 재건을 꾀했으나 예루살렘 점령 3년만에 페르시아는 다시 유대인들을 추방하였다.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그 후 1,350년 tj동안 성전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페르시아에 거의 점령을 당했던 동로마는 헤라클리우스를 중심으로 영토를 회복하였고 예루살렘도 되찾게 되었다.
이슬람시대의 시작(630~660)
무함마드는 유복자로 태어났고 여섯 살 때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삼촌에게 입양되었고 삼촌의 원정 무역단을 따라다녔다. 시리아의 보스라에서 어느 수도사로부터 그리스도교에 대해 배웠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문헌에 대해 연구했으며 예루살렘을 가장 고귀한 성지 가운데 하나로 존중하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나이 20대에 과부 카디자의 대상 관리자로 고용되었다가 그의 성실함과 정직함에 감명을 받은 카디자로부터 청혼을 받고 자기보다 나이가 15살이나 더 많은 카디자와 결혼을 하였다. 결혼과 그의 탁월한 능력으로 얻은 경제적인 부는 그에게 여유를 주었고 무함마드는 금식하며 사색하며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함마드는 히라산 동굴에서 첫 계시를 경험하게 된다. 무함마드는 아내 카디자의 삼촌이자 에비온파 기독교인이었던 와라까 븐 나우팔에게 가서 사정을 설명하였다.
와라까는 무함마드가 만난 것이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이었다며 무함마드가 하느님의 예언자라고 말하였다. 카디자는 집으로 돌아와 무함마드에게 삼촌이 말한 것을 모두 알려주었고 그의 예언자 직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무함마드)는 이슬람에서의 최초의 무슬림이 된다.
첫 계시를 받은 후 점차 무함마드의 양자들과 노예 그리고 친한 친구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였고 3년째 되던 해 무함마드는 자신의 친구와 친족을 모아놓고 단일신 알라(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게 된다.
하지만 친구와 친족들은 그를 비난하고 모욕하여 무함마드를 무시했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메카로 오는 순례객들에게 단일신 사상을 전하기 시작했고 메카의 카바 신전을 지키며 순례객들로 수입을 얻었던 부족원들이 무함마드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삼촌이 죽은 후 메카인들이 죽이려 하자 무함마드는 유대인 부족이 구축한 대추야자 오아시스인 야스리브로 이주하였는데, 그곳이 예언자의 도시 메디나가 되었다. 무함마드가 최초의 신봉자들과 유대인 동맹자들과 통합한 그 해가 622년 이슬람력의 원년이 되었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 최초의 모스크를 세우고 금요일 해질녘(유대인의 안식일)에 예배했고 회개의 날에 금식하였다. 무함마드는 자체의 법을 가진 작은 나라를 세웠고 자신의 고향인 메카의 저항에 직면하면서 스스로 방어하고 정복하는 투쟁(지하드)이 필요했다.
630년 무함마드는 메카를 완전 장악하고 아라비아 전체에 일신교를 퍼트렸다. 632년 무함마드가 죽자 장인 아부 바르크가 그를 계승했고, 아부 바르크는 아라비아를 안정시키고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과 맞서게 되었다. 아부 바르크가 죽은 후 오마르가 그 뒤를 이었다.
헤라클리우스의 비잔틴군은 페르시아와의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는 상태에서 오마르의 아랍군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들은 오늘날 요르단 시리아 이스라엘의 골란 사이를 흐르는 야르묵강 협곡에서 만나 싸웠는데 636년 신은 모래 폭풍을 일으켜 그리스도인(비잔틴)들의 눈을 가렸고 아랍인은 비잔틴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수세기에 걸친 비잔틴의 압제를 물리침으로 인하여 유대인들도 아랍인들을 환영하였다. 오마르는 유대인들에게 성전 산의 보수를 맡김으로 유대인들의 희망에 불을 붙였다. 오마르가 임명한 최초의 예루살렘 총독도 유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