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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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장생약을 구하려 애썼던 진시황의 이야기는 장수를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가장 잘 나타낸 예라 하겠다. 성경은‘영원한 생명’인 영생을 얻는 비결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요한복음 5:24).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을까?

성경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죽은 자가 모두 부활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사도행전 24:15). 그렇다면 어차피 모두 부활하여 생명을 계속 이어 나갈 텐데 영생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이런 모순된 해석은 성경에서 말하는‘생명’의 의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영생’의 올바른 의미는 무엇일까?

‘생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성경에서 ‘생명’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쉬케’, ‘비오스’, ‘조에’가 있다. 먼저 ‘프쉬케’라는 단어는 한글 성경에서 ‘목숨’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 ‘프쉬케’는 육신과 정신, 영혼을 포함한 존재 자체를 의미하며, 레위기 17장 11절의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의 ‘생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페쉬’와 같은 뜻의 단어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물로 주신 그의 목숨은 단지 육체만을 의미하지 않고 ‘존재 자체의 생명’을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프쉬케)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 6:25).

두 번째 ‘비오스’라는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동물적 ‘생명’을 의미한다. 생물학을 의미하는 ‘biology’란 단어의 어원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목숨을 다하면 죽는다’할 때 이 유한한 생명, 이것이 ‘비오스’이다.

불로장생을 꿈꾸었던 진시황이 찾았던 생명이 바로 ‘비오스’이다. 우리가 생물학을 통해 각 동물의 습성과 행동 양식을 연구하듯 ‘비오스’란 단어에는 단순한 목숨뿐만 아니라 그 생물의 살아가는 방식이 내포되어있다. 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활동해야 하는 본능이 포함된 ‘생활’을 포함하고 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비오스)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누가복음 8:14).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비오스)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한일서 2:16).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비오스)을 하려 함이라”(디모데전서 2:2).

참 생명이라고도 불리는 ‘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생명’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조에’이다.
‘참 생명’이라고도 불리는 ‘조에’는 영적인 생명이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갖게 되는 생명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을 때, 인간은 ‘조에’라는 생명을 잃었다.

오직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프쉬케)을 대속물로 내어주어 영원한 제사를 지내셨고 이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가 교제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길이시며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조에’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이라고도 불린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생에서뿐만 아니라 종말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는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조에’ 생명은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때 즉시로 얻게 되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에 즉시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을 성경은 영접한 자(믿는 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은 영접한 자(믿는 자)를 아는 관계에 있다고도 말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갈라디아서 4:9)

우리 주변에서 현 미국 대통령인 트럼프를 안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트럼프에 대해서 안다는 말일 것이다. 특별히 정치학이나 국제관계에 관심이 있거나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트럼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국제정치 철학,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성격은 어떠하며, 가족관계는 어떠한지, 트럼프도 잊고 있는,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알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을 트럼프와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트럼프에 대해서 알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요즘같이 인터넷이 발달한 사회에서는 더욱 그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에 대해 다양한 지식을 가진 자라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자라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그를 향하여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