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고백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특별한 계기가 되는 사건이나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한 기억으로는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 인생을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5대째 믿어 온 보수 신앙의 가정에서 자란 나에게 교회생활은 항상 삶의 일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느낌도, 반감도 없는 그런 상태로 자랐다. 청소년부 시절, 매주 토요일이면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교회에 모여서 기도회와 성경공부를 하고 밤 늦게까지 주일을 준비하며, 그리고 주일은 온종일을 교회에서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왜 교회를 다니느냐?”는 의외의 질문을 받고 난 후,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분명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약간의 방황의 시기가 지났고, 그 후 나는 주님을 나의 구원자이며 주인으로 모시게 되었다. 성령을 체험하고 주님을 바로 발견하고 나서야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삶의 방향을 뚜렷하게 잡을 수 있었다. 인생의 분명한 목적과 분명한 이유를 갖게 되었을 때 더욱 열심히 하나님의 일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즈음 한 번씩 자신의 믿음의 연륜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어떤 사람은 누구나 잘 아는 유명한 목사님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또 어떤 사람은 무슨 신령한 은사나 체험을 한 것이 마치 구원의 표지가 되는 것처럼 이해하며 자랑한다.
나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구원의 확신이 없는 신앙의 연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실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와 사람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인정했다 하더라도 자신의‘부족함’을 깨닫고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얼마나 갈망하며 체험하느냐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곧 나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 그분은 역사하신다.
한국 음료 시장에서 판매하고 있는 상품 중에 2%라는 상품이 있다. 상품 설명을 보면, 2%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마시는 음료수라고 적혀 있다. 즉 물을 마시면 98% 정도는 충족되지만 여전히 남는 아쉬운 2%가 있고 그것을 충족하고 싶다면 이 음료수를 마시라는 것이다. 이 음료수를 몇 번 마셔보았지만 2%라는 말에 깊은 공감을 한다. 왜냐하면 항상 나 자신에게도 채워지지 않는 2% 때문에 고민해 왔기 때문이다.
에디슨은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 고 말했다. 과거의 우리에게 있어 이 말은 노력하면 천재가 될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하고 적용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 내가 사는 이 시대는 99%의 노력보다 1%의 영감이 더 아쉬운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노력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모두가 동일하게 하고 있지만, 1%의 영감은 학업, 가정, 직장, 그리고 신앙 등의 모든 영역에서 빛을 보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글을 쓰며 설교를 하는 나에게도 1%의 영감이 중요하다면, 다른 이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부족함의 영역은 누구에게나 있다. 물론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부족분은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의 일에 있어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이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한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부족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면 혹자들은 그것을 사치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완벽주의 때문이라고 부정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위해 날마다 노력하고 있다. 양서를 읽고, 배움을 계속하면서, 각자의 인생과 사역에 노력을 기울인다. 그 이유는 이 부족함이 나의 삶에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부족함은 나의 인생을 결정하는 전부일 수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잘 달리는 말과 그렇지 않은 경주마의 속도 차이는 약 1~2초 사이라고 한다. 그러나 1~2초의 미세한 차이가 경주마의 가격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는 300배 이상의 차이를 나게 한다.
1등 하는 말이 보통의 경주마보다 300배를 더 잘 달려서가 아니라 미세한 1초가 300배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즉 나의 부족함은 나 자신의 절대 가치를 결정하는 최후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의 전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전쟁이나 경기에 있어 최후의 5분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 한다. 시간적으로는 5분의 차이이지만 이미 모든 힘이 빠져 나간 상태에서 5분을 더 버틸 수 있다는 것은 경기와 전쟁에서 승리를 결정하는 전부일 수도 있다. 결국 내가 하는 많은 훈련은 이 부족한 최후의 조금을 위한 것이었다.
한때 책에서 ‘시간X속도=거리’라는 재미있는 공식과 설명을 보았던 것이 기억난다. 같은 10시간을 어떤 사람은 걸어서, 어떤 사람은 차를 타고, 어떤 사람은 비행기로 갔다고 생각해 보자. 그들이 간 거리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내가 예수님을 얼마 동안 믿어 왔는가 하는 시간에 얼마나 주님을 알려고 노력했는가라는 속도를 곱하면 거기서 하나님께로 간 거리가 나온다. 물론 물리적인 수치를 계산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간 거리를 측량할 수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몇 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는가에 못지 않게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노력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의 경건 훈련은 구원받기 위한 조건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전심으로 주님을 향해서 더 빨리 그리고 더 열심히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전 영역에서 부족한 부분을 위해 열심히 경주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부족함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부족분은 늘 불평과 비교와 시기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것이 감사의 제목이 되어야 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감사와 자기 발전에 대해 고민해 왔다. 현실에 자족하며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 개발을 등한시하게 되고, 자기 개발에 충실한 사람은 삶에 있어 감사보다는 불만이 많다고 생각해 왔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도전과 변화는 욕구 불만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감사와 자기 개발이 동시에 일어나며 그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즉 예수님 때문에 나는 치열하게 삶을 살면서도 한편으로 현실에 감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현재 나는 교회를 개척한지 작년으로 10년이 되어 안식년을 보내고 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였으며, 정말 나처럼 부족한 사람이 믿음의 공동체를 이 자리까지 인도한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믿음의 역사에 무엇보다 주된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부족함을 함께 나누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위로하며 격려한 교회의 성도들이다. 그래서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만나서 동역하고 있는 그들을 생각할 때 감사하며 또 감사를 드린다.
나에게 남아 있는 부족함은 내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인간임을 깨닫게 해 주며, 또 능력의 크심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언제나 나에게 남아 있는 부족함이 발휘되던 순간은 여전히 주님께서 함께 계셨고, 그분이 보내신 사람들이 있었으며, 결국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셨다.
부족하다고 느낄 때 감사할 수 있음은 약함 중에 강함이 되시는 나의 주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분과 함께, 그분께서 보내신 사람들과 함께 나의 남은 인생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그리고 발견케 하신 거룩한 일에 좀더 많은 열심을 내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