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고 정현종 시인은 <방문객>에 적고 있다.
지금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현재 그리고 과거와 미래까지 그 모든 일생을 품고 오는 사람이기에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사람과의 만남은 소중하다. 만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계의 지속성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소통이 잘 되어야 한다. 소통에는 먼저 말이 통해야 한다. 말이 통하지 못하면 불통이고 말이 통하면 소통이 된다. 소통이 잘 되어야 서로 형통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본적인 대화조차 할 줄을 모른다.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타인이 말할 기회는 묵살하기도 한다. 상대방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면 말머리를 돌리거나, 말허리를 자르거나, 말꼬리를 잡으려고 한다. 나쁜 말, 싫은 말, 화난 말은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감정적인 말이나 의도를 가진 말은 상처를 준다. 이러한 언어폭력이 가정과 학교 그리고 직장과 단체에서도 교묘하게 악의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아픔을 주기도 한다.
종교의 말을 가지고 행해지는 언어폭력은 위선에서 비롯된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갈릴리 호숫가에서 만난 베드로에게 주신“내 양을 치라”는 말씀을 오해(?)하여 양들을 때리는 언어폭력을 접하게 된다.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상태에서 생각조차 없이 함부로 쏟아내는 상처주는 말은 분명하게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다. 무엇보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언어폭력이 아무런 제약 없이 이루어질 때 그 심각성은 일방적으로 들어야 하는 교인에게 미친다.
무조건 들어야만 하는 회중은 고통스럽다. 회중가운데 한 사람이 개인 험담을 듣고 참다가 예배당을 조용히 나가면 설교자는 나가는 교인을 보고 자기 감정에 따라 반말이나 빈정거리는 말투로 마치 말씀처럼 내뱉는 말은 독이다. 어떤 형태로든 언어폭력은 반드시 멈추도록 해야만 한다. 언어폭력이 반복이나 중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충실한 본문 중심의 설교에서 벗어난 그 어떤 개인적인 말은 자제하고 온전하게 하나님 중심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나눔의 시간을 통해 점검해야 한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갈망하는 회중에게 전할 말씀에 대한 공부와 훈련 그리고 전달하는 방법 등을 스스로 점검할 수 있도록 녹음을 하거나 활동사진으로 찍거나 가까운 사역자와 진지하게 설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좋겠다.
설교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다는 마음도 버려야 한다. 목사는 분명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을뿐만 아니라 교회의 추천을 받아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고 교회법에 합당한 절차를 통한 검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성경을 바르게 알고 믿으며 확신을 갖고 자신의 인격을 통한 삶이 말로 회중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말과 글은 꾸밀 수 있어도 삶을 꾸밀 수 없다. 거룩한 척해도 거북할 뿐이다. 설교자는 거룩한 말을 하는 것 같지만 회중은 거북한 말을 듣고 있어 고통스럽다.
멋진 말로 설교하면 거북하고 참된 말로 설명하면 반응하게 된다. 이제 말은 줄이고 손으로 섬기고 지갑을 열어야 한다. 진정으로 주 안에서의 살가운 사귐은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진실한 태도에서 비롯된다. 이는 자신의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일생까지도 내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