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넷째 주 찬송/ 465장(통523장) 주 믿는 나 남 위해
찬송 시 ‘주 믿는 나 남 위해’는 월터(Howard Walter, 1883-1918)목사님이 지었습니다. 그는 미국 코네티컷 주 뉴브리튼(New Britain)태생으로 프린스턴 대학을 거쳐 하트포드(Hartford)신학교, 글래스고의 에든버러 대학, 괴팅겐 대학 등에서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회중교회 목사안수를 받고, 미국 아시럼힐(Asylum Hill)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다가 선교사역에 더 큰 뜻을 품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극동지역에 관심이 있어서 일본과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열심히 헌신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원래 심장이 약하여 자주 마비 증세를 보였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을 돌보지 않고 너무 열정적으로 헌신한 나머지, 35년의 짧은 생으로 순교적 삶을 살다간 분입니다.
이 찬송 시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월터 목사님이 일본 선교사로 파견되어 와세다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을 당시인데요, 그러니까 그의 나이 24세 때인 1907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새해의 다짐을 담아‘나의 신조’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습니다.
“나는 진실하리라.(I Would be true,)… 나는 정결하리라(I Would be pure)… 나는 강건하리라(I Would be strong)… 나는 용감하리라(I Would be brave)… 나는 친구가 되리라(I Would be friend)… 나는 주리라(I Would be giving)…”
바로 우리 찬송가의 1,2절 가사인 여덟 가지의 신조를 적고, 그렇게 살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 글을 미국에 계신 그의 어머니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는데, 그의 어머니는 이 시가 너무 좋아서 ‘하퍼의 자선시’(Harper’s Bazzar)지에 보내 출판케 되므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지요.
이후 월터 목사님은 4개의 다짐을 추가하여 지금의 3절 찬송 시를 완성시켰고, “I would be…”로 시작되는 12개의 다짐이 모두 완성된 것입니다. 12는 완전수이기도 하지요.
곡 이름 PEEK는 작곡자인 피크(Joseph Yates Peek, 1843-1911)의 이름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이 피크라는 분은 악보를 보고 노래할 줄도 모르고, 들리는 음도 적을 줄도 모르는 그야말로 음악에 문외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작곡했냐고요?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음악성 덕분이죠. 그는 1909년, 월터 목사님으로부터 낱장으로 된 ‘나의 신조’를 받게 되었는데 너무나 그 내용이 좋아 매일 읽고 다짐하다보니, 4. 7. 4. 6으로 된 운율에 그냥 새로운 멜로디가 솟아나 붙게 되어 외우게 되었답니다.
마침 찬송인도자이며, 성악가이고, 오르가니스트였던 튤라(Grant Colfax Tullar, 1869-1950)목사님이 피크가 외워서 부르는 자작 찬송을 듣고, 그 자리에서 받아 적어 악보화(樂譜化)시키고 화음까지 붙여 이렇게 말쑥한 곡이 탄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문맹인 사람으로부터도 시를 쓰게 하시고, 악보를 못 읽는 음맹(音盲)으로부터도 작곡하게 하시니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찬송가 중 크리스천의 진정한 삶을 노래하는 드문 내용이기에 나는 이 찬송을 매우 귀하게 여깁니다.
7월 다섯째 주 찬송/582장(통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찬송 시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함경북도 경흥 태생이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1901-1990)목사님이 지었습니다. 그는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를 거쳐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일제 강점하였던 때인 1932년에 귀국하여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교사로, 만주 용정(龍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서 교목으로도 일 했지요. 김 목사님은 조선인은 조선인의 손으로 양육되어야 하고, 신학교 역시 조선인의 손에 의해 세워져야한다는 생각으로 1940년 조선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요, 이 신학교는 약칭 장로교단의 기장(基長)으로 불리는 대한기독교장로회 교단 신학교로서 지금의 한국신학대학교의 전신입니다.
이곳에서 평생 교수를 거쳐 학장까지 역임하였습니다. 김 목사님은 한국교회개혁 비전을 제시한 선각자이지요. 1940년대 말부터 우리 한국교계에서 소용돌이 친 보수신학과 소위 신신학(新神學)으로 불리는 자유주의 신학과의 논쟁이 있었고, 그로 인해 결국은 교계가 나뉘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는데, 그 일선에 계셨던 한국교회의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를 ‘자유주의 신학의 기수’로 불리고,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3선 개헌 반대운동을 비롯하여 정부를 상대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여‘행동하는 신앙인’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이 찬송은 원래 1966년 대한기독교장로회 제50회 총회가 열렸을 때‘총회 기념가’로 만들어졌는데, 이때의 곡은 당시 연세대 교수인 나운영 장로의 작품으로 불렸지요. 이 곡은‘청년찬송가’에 수록되었다가 1967년‘개편찬송가’가 편찬되면서 이동훈 교수의 곡으로 바뀌어 수록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원래 기장 총회를 기념해 만들어진 만큼 원래 찬송제목도 ‘교회’인데요, 교회가 영혼구원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국가에 올바른 의식을 가지고 기독교적 국가관과 사명을 가져야겠다는 그분의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김 목사님은 이 찬송이 애국가와도 같이 온 국민에 불리기를 바랐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지금은 국가기념일마다 교회에서 애창되고 있지요.
이 찬송은 1929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타고르의 시 ‘동방의 등불’을 연상케 합니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동아일보 기자로부터 한국방문을 요청받고 응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을 소재로 이 4행시를 기고한 것입니다. 일제 강점 하에 있던 우리 국민들에게 희망을 잃지 말고 꿋꿋이 독립을 이루기 바라는 마음에서 보낸 격려의 시인 것이지요.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될지니”(주요한 번역)
곡명 교회는 ‘개편찬송가’편찬 시 그 편찬 위원이었던 이동훈(李東勳, 1922-1974)선생에게 위촉하여 작곡되었습니다. 이동훈 선생은 바이올리니스트이면서 훌륭한 합창지휘자이지요.
그분이 활동하던 1960년대는 우리나라 아마추어 합창음악의 전성기라 할 만 한데요, 대한합창단(나운영 지휘), 서울코랄(박재훈 지휘), 성종합창단(곽상수 지휘), 시온성합창단(이동일 지휘), 아가페합창단(김두완 지휘), 필그림합창단(이동훈 지휘), 한국오라토리오합창단(박태준 지휘) 등 등 앞 다투어 선의의 경쟁을 하며 활동을 하며 황무하기 이를 데 없는 교회음악계에 발판을 마련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찬송가 작곡가들 거의가 이 합창단들을 지휘하며 외국의 유명한 오라토리오나 칸타타, 그리고 교회 성가대를 위한 찬양곡(Anthem) 등을 번역 발표, 출판하였습니다.
흑인영가나 포스터 가곡 같은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곡을 연주함으로 고도의 합창기법을 구사하고, 그들이 직접 작곡한 성가들을 합창단을 통해 발표하므로 그의 창작열도 불태우곤 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성가대가 이렇게 세계에 자랑할 만큼 훌륭하게 성장한 것도 이들 선구자들의 개척자적인 헌신에 비롯된 것이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