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하면 때 밀이 수건인 이태리 타올이 생각난다. 이어서 목욕탕이 떠오른다. 지금은 목욕탕에 잘 가지 않지만 말이다. 목욕탕에 가면 반달 모양의 유리문 사이로 돈을 내고 전표를 받아 든다. 돈을 받고 거스름돈과 전표를 주는 주인의 등 뒤에는 ‘맡기지 않는 귀중품은 책임지지 않습니다-주인 백’ 이라고 서툰 글씨로 쓰여 있다.
어린 때는 이 말을 읽을 수는 있었는데 마음에 와 닿지 않다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보니, 커서 우연히 다시 보게 된 이 안내 글처럼 맡기지 않는 귀중한 내 생명은 하나님도 책임지지 않겠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탈의실로 가서 색 바래고 때 묻은 붉은 바구니에 전표를 넣고, 옷을 벗고 나서 탕 안으로 가려면‘때밀어 드립니다’는 푯말이 서 있다. 대부분 아버지와 아들이나 또는 어머니와 딸이 서로 등을 밀어 주기에 돈을 주고 때를 밀지는 않는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혼자오면 서로 등의 때를 밀어주기도 한다.
몸의 때를 밀기 위해 목욕탕에 가는 것처럼 영혼의 때를 밀기 위해 교회에 오라고 하면 어떨까. 우리들교회 김양재 목사는 교회를 목욕탕에 비유한단다. 복음광고 중에도 ‘회개는 영혼의 때를 벗깁니다’는 문구도 있다.
새 찬송가 523장 또는 통합찬송가 262장의 “어둔 죄악 길에서” 후렴에 보면,“이때라, 이때라, 주의 긍휼 받을 때가 이때라” 는 가사도 있다. 이 짧은 가사에 ‘때’가 4번이나 나온다. 이사야 55장 6절에는 “너희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한다. 여기서도 2번이나 때가 있다.
‘때’하면 몸의 때나 영혼의 때 말고 시간, 기회, 선택 그리고 사람마다 지식이나 경험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수도 있다. 솔로몬이 노년에 썼다는 전도서 3장에도 ‘모든 기한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 할 때가 있느니라”
예수님도 30년의 사생애에서 ‘때가 차매’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다 때가 차야 부르시고 사역을 감당했다. 그럼, 어느 때에 살고 있는지 성경을 통해 자신을 살펴보라. 성경은 지금의 내 영혼의 때를 보여줄 것이다. 아직 때가 아니면 기다려라. 혹 열매를 기대한다면 바라고 원하는 것을 심어야 거두게 된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전도서 11장 6절에서 솔로몬 왕은 증거한다. 내 때도 오는 것을 알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