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셋째 주 찬송 69장 온 천하 만물 우러러
우리는 몇 회에 걸쳐 성 어거스틴이 정의한 ‘찬송의 3요소’(‘찬미’,‘노래’,‘하나님께 드려짐’)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번엔 둘째요소인 ‘노래’에 대하여 생각해 보죠. 노래는 노랫말인 가사와 곡조로 되어 있지요. 그 중 가사의 내용을 가지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 드리는 언어는 가장 아름다워야 합니다. 우리는 글을 쓸 때에도 위 어른들께 보낼 때면 경어(敬語)로 좋은 어휘를 선택해서 바른 글씨로 쓰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은 어떨까요. 성경에 나타난 모든 노래들은 아름다운 시로 되어 있습니다.
150편의 시편은 물론이고, 누가복음에 나오는 송가(頌歌, canticle)를 비롯해‘모세의 노래’,‘한나의 노래’, 사도 요한의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모든 노래들이 훌륭한 시인 것입니다.
‘시’(詩)란 한자를 보십시오. 말씀 ‘언’(言)변에 절‘사’(寺)자로 되어있지 않습니까. 말로서 절을 짓는다는 뜻인데, 감동이나 생각이 가장 간결한 언어로 표현된 아름다운 문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찬송은 아름다운 시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시인들인 셈이죠.
찬송 시 ‘온 천하 만물 우러러’를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시입니까.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St. Francis of Assisi, 1182-1226)가 이탈리아 어로 쓴 시인데, 여러 나라 말을 거쳐 우리 찬송이 되었는데도 이렇게 아름다우니 원문은 어떻겠어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 프랜시스는 젊은 시절 방탕하다가 20세 때에 회개하고 돌아와 성직자가 된 이후 기도생활과 구제 사업으로 온 생을 주님께 헌신하는 삶으로 바치지 않았습니까. 가난하게 살아가며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면서 ‘형제단’ 수도원 운동을 이끈 청빈(淸貧)주의자였던 그는 주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문둥이들과도 살았고, 짐승들뿐만 아니라 벌레까지도 사랑하여‘동물의 수호성인’이라는 별칭을 가졌습니다. 성 프란시스의 삶을 알게 된다면 이 찬송을 더욱 의미 있게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1225년 여름에 이 시를 지었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인 43세 때입니다.‘태양의 송가’(Altissimu, omnipotente, bonsignore)라는 장편 시 중에서 그 일부를 찬송 가사로 만든 것이죠.
찬송 시는 매우 긴 데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이든의 오라토리오‘천지창조’에서 첫 째 날부터 하루하루 날이 바뀔 때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보며 감탄하여 천사들이 창조의 업적을 찬양하듯 노래하고 있습니다.
처음의 1절과 2절은 해와 달, 바람, 구름, 노을 등 하늘과 우주의 모든 것들을, 3절과 4절은 물과 불, 땅과 꽃, 나무들과 열매 등 땅위의 모든 것들을, 5절과 6절은 최고의 마스터피스인 인간들에게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외칩니다.
곡명 LASST UNS ERFREUEN은 원래 부활절 찬송 곡조인데, 표기된 것과 같이 1623년 꼴로녜(Cologne)판인 ‘교회찬송가’(Geistliche Kirchengesang)에 성 프란시스의 가사가 붙음으로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이 곡조는 처음부터 ‘도레미파솔’로 상승하여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을 향해 우러러 찬양하게 합니다.
마지막 세 번의 ‘할렐루야’는 다시금 ‘도시라솔파미레도’로 하강 순차진행을 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한 몸에 받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합니다.
2월 넷째 주 찬송 273장 나 주를 멀리 떠났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유명한 이야기인 ‘되찾은 아들’이 바로 찬송 시 ‘나 주를 멀리 떠났다’의 주제이고, 그 상황들을 자세히도 고백하고 있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회개의 노래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정의한 ‘찬송의 3요소’(‘찬미’,‘노래’,‘하나님께 드려짐’)가운데 그 둘째 요소인 ‘노래’에 대하여 생각해 보던 중 노랫말인 가사에 대하여 찬송가(Hymn)와 복음가(Gospel Song)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온 천하 만물 우러러’(69장)에서 찬송은 문학적으로 가치가 높은 가사이어야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시이어야 하지요. 그런데‘나 주를 멀리 떠났다’같은 복음가는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모르거나 떠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해하기 쉬운 말, 더욱 더 실감나는 말인 구어체(口語體)로 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교양이 높은 사람에게도 필요하겠지만 못 배운 사람, 힘이 없는 사람, 병든 사람 등 모든 대중들에게 전해져야겠기에 그 전해지는 언어도 역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만약 시인의 집에 불이 났다고 해 봅시다. 그 시인이 “오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여…”하며 아름다운 언어를 구사하여 시를 짓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아니죠. “불이야” 다급히 소리치며 달려 나오겠지요. 이것이 복음의 긴급성이랄 수 있는 것입니다.
노래 위쪽에 8.5.8.5.라고 씌어 있지요. “나 주를 멀리 떠났다”의 여덟 글자,“이제 옵니다” 의 다섯 글자의 운율(韻律, rhyme)을 나타낸 것입니다. 복음가 역시 노래를 불러야하기에 리듬에 따라 정해진 운율이 있어 최소한의 시의 형태는 갖추었을지라도 수준 높은 시라고는 할 수 없지요.
오히려 일상(日常)의 언어로 되어있기에 우리에게 가슴 뭉클하게 하는 감성적인 호소가 있습니다. 찬송 시를 보면 “이제 옵니다” “주여 옵니다”를 반복하여 답창(答唱, responsorium)형태를 취하여 더욱 호소력이 있습니다.
곡명 COMING HOME은 미국의 유명한 찬송작곡가인 커크패트릭(William James Kirkpatrick, 1838-1921)이 작사 작곡했습니다. 커크패트릭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던카논(Duncannon) 태생으로 어렸을 때 학교 교사인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우고, 바이올린, 첼로, 플륫을 비롯한 관현악기를 모두 다룰 만큼 음악의 재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목재를 다루는 기술도 있어 목공소, 가구제조업 같은 일도 했었는데요, 마흔 살 때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로는 찬송가를 짓고, 책을 출판하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83세 필라델피아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100여권 이상의 찬송가를 출판했다고 하니 그의 창작력과 봉사심이 대단하죠. 커크패트릭이 작곡한 찬송가는 우리 찬송가에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40장), 생명의 주여 면류관(154장), 신랑 되신 예수께서(175장), 이 기쁜 소식을(185장),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217장), 주의 사랑 비칠 때에(293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370장), 오 놀라운 구세주(391장),먹보다도 더 검은(423장),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452장), 기쁜 소리 들리니(518장), 어둔 죄악 길에서(523장),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539장), 구주예수 의지함이(542장)>등 열네 편과, 작사도 하고 작곡도 한‘나 주를 멀리 떠났다(273장)’ 한편 등 열다섯 편이나 실려 있습니다.
찬송의 작사 작곡 년대가 1892년이라고 적혀 있지요? 이때에 커크패트릭은 펜실베이니아의 로우린스빌(Rowlinsville)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입니다. 집회 때 독창 순서를 맡은 성악가가 목소리는 훌륭한데 불신자였다고 해요.
이를 안타까이 여긴 그는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 중 영감을 얻어 이 찬송을 지어 독창 하도록 부탁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찬송을 부르던 그날 저녁 이 성악가는 자신이 주님을 떠난 죄인임을 깨닫게 되어 감격에 목메어 끝까지 부르지 못하고, 꼬꾸라져 울면서 회개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집니다. 음악에 깃든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게 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