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넘어서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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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SNS에 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시험문제와 한 학생의 엉뚱한 답이 올라와 화제가 되었다. 국어과목 문제였는데‘다음 중 틀린 부분을 고치시오.’라는 맞춤법에 대한 문제였다. 그 문제에 등장한 문장은 이렇다.

“헤헷 맡있겠는걸 혼자 먹어야지. ”당연히“맡있다” 의 맞춤법이 틀렸고 정답은“맡”이라는 글자에 받침 하나만 “ㅅ” 으로 바꾸면 되는 쉬운 문제였다. 그런데 한 학생이 그 문제에 아주 기가 막힌 답을 적었다.
‘혼자’라는 글자를 지우고 ‘같이’라는 글자로 바꾼 것이다. “헤헷 맡있겠는걸 같이 먹어야지” 라고 바꾼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가차 없이 그 학생의 답을 오답으로 처리했다.

어떻게 보면 그냥 한번 웃고 넘어갈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문제를 가만히 들여다 보니 나는 어른으로서 참 많은 것을 반성하였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기심과 분열을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강요하고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까짓 맞춤법 하나 맞추는 것이 정말 대수인가? 오히려 받침 하나보다 전체 의미를 더 성숙하고 살기 좋은 모습으로 바꾸었던 그 아이의 답이 더 옳은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쩌면 점점 더 자기만을 위하고 남을 돌보지 않는 삭막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지 모른다. 좋은 것을 함께 하고 같이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나 혼자 하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하필 주님은 이런 삭막한 세상 속에 교회를 남겨 두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교회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사명을 갖게 된 것이다.

에스비 베반스(S. B. Bevans)와 알피 스크로더(R. P. Schroeder)가 선교적 읽기를 통해서 발견한 선교적 교회의 세 번째 특징은 함께 하지 못하는 서로간의 갈등과 연관이 깊게 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교회는 오랜 기다림을 통해 성령님을 경험하고 그 성령님의 능력으로 교회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성령의 능력으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다이너마이트 같은 변혁적 설교로 사람들의 심령을 뒤집어 놓았다. 그렇게 역동적으로 출범한 예루살렘 교회였지만 얼마 가지 못해 위기를 맞이한다. 교회 내에 심각한 갈등과 분열이 생긴 것이다.

혈통을 그렇게 중요시하는 유대인들이었지만 그들 안에도 어느 정도 그룹이 나누어졌다. 원래부터 유대 땅을 중심으로 대대로 살아 오던 히브리파 유대인과 중간에 해외에 나가 정착한 우리 같은 이민자들인 헬라파 유대인들이 그 대표적인 그룹이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교회에서 구제를 할 때 좀더 안면이 있고 가까운 히브리파 과부들을 더 챙겨 주었다.

구제에서 자꾸 소외되던 헬라파 과부들은 불공평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였고 그것은 교회 내 큰 갈등으로 이어졌다. 이 갈등은 점점 속으로 곪아서 교회가 분열되기 일보 직전까지 이어졌다. 아마도 맛있는 것을 같이 먹고자 하는 마음 보다 우리 편끼리 먼저 챙기려는 마음이 그 당시도 분명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이 지구상의 모든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피해갈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있다면 바로 갈등의 문제일 것이다. 선교적교회라도 별 수 없다. 사람들이 모인다면 결국 그 안에는 언제나 갈등이 일어나고 그 진리는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교회에 적용이 된다.

문제는 갈등이 있는가, 없는가? 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갈등을 어떻게 풀어가는가 하는 것이 선교적교회의 중요한 특징이 된다는 것이 에스비 베반스와 알피 스크로더의 설명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제일 먼저 이 문제를 직면하자 원칙을 세우고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함께 풀어 나간다. 그 구체적인 원칙은 자기희생과 화해였다. 헬라파 과부들이 소외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교회는 이 일을 전담할 집사들을 뽑는데 대부분이 헬라식 이름의 사람들이다.

이것은 히브리파 사람들이 자신들을 희생하고 한발자국 물러나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자기희생이 거름이 되어 화해의 물고가 트인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사도들은 교회에 본질인 말씀과 기도에 더욱 집중한다. 결국 헬라파 출신들의 집사들을 선출하여 일을 맡긴 해결책과 이를 받아 들여준 히브리파 사람들의 자기희생이 이 갈등을 뛰어 넘는 신의 한 수가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예루살렘교회는 단지 갈등을 해소하였을 뿐인데 하나님은 그 계기를 통해서 예루살렘교회를 선교적교회로 변화 시킨다. 실제로 구제활동을 위해 뽑혀진 7집사들은 스테반을 비롯해서 모두 복음전파의 선두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헬라파 배경을 힘입어서 예루살렘 지역을 뛰어 넘는 선교의 문을 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빌립 집사다. 유대인들이 꺼려하던 사마리아까지 선교의 손을 내밀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한 사람이 바로 이 갈등을 통해 선출된 빌립이었다. 그뿐인가? 사실 이방인 선교의 물꼬를 텄던 바울(사울)은 그 갈등해소를 위해 뽑혔던 스테반의 죽음을 통해 성경에 처음 등장하게 되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예루살렘교회에 일어난 이 갈등과 해결은 그 교회가 선교적교회로 바뀌게 되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셈이다. 성경이 보여주는 모습이 이렇기에 우리는 갈등과 그 해소가 선교적교회의 세 번째 특징이 된다고 감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목사님! 이게 말이 됩니까?”
“이건 우리가 결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 동안 나름 조용하던 교회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뿐만 아니라 그 당시 한참 선교에 힘을 내고 확정하고 있었는데…… 그 날 회의는 정말 작정이라도 한 듯이 여기 저기서 큰 목소리들이 오고 갔다.

다른 분야도 아니고 선교비에 대한 의혹이 제기 되었다. 사실 문제가 된 금액 자체는 그렇게 큰 것이 아니었다. 뉴질랜드 달러로 한 800불 정도였다. 하지만 성도들의 마음은 이미 깊은 갈등의 골을 파고 나뉘어져 있었다.

결국 몇 달이 지나는 동안 교회에 가장 책임이 많은 당회의 리더십까지 무너져 버렸다.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갈등이라는 커다란 쓰나미가 성도들의 마음을 한번 휘젓고 지나가자 여기 저기 상처만 남게 되었다.

부끄럽게도 나의 목회경험에는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에 한방 먹은 경험이 있다. 그리고 결국 그 갈등의 결과로 한참 동안 활발하게 진행되던 선교는 멈추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갈등이 얼마나 무서운 교회와 선교의 적인지를 잘 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갈등은 그 반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선교적교회의 특징은 반대로 이 갈등이다. 갈등을 잘 뛰어 넘기만 하면 오히려 교회가 엄청난 선교적교회로 바뀔 수 있는 변환 점이 된다. 그렇다 세상에 갈등이 없는 교회가 어디 있을까? 만약에 이 갈등의 문제를 우리가 피해갈 수 없다면 이 갈등을 통해 우리의 교회들을 선교적교회로 바꾸어 보면 어떨까? 갈등해소가 도화선이 되어 온 교회가 선교로 방향을 전환하고 전진하는 선교적교회가 될 수 있다는 증거를 2000년전에 예루살렘 교회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