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이상을 현실로 풀어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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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는 뜻을 정했다. ‘고국으로 돌아가서 무너져 있는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건축해야겠다.’는 뜻이다. 그가 뜻을 정한 해는 아닥사스다 왕 20년 BC 445년이었다. 바벨론 1차 포로로 계산하면 160년, 예루살렘 성벽이 파괴된 3차 포로로 계산하면 140여년이 지난 시점이다.

이런 상상을 해 본다. 만약 140년 후에 조국 대한민국에 극심한 위기가 찾아왔을 때, 우리의 후손들 중에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 달려갈 수 있는 느헤미야와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을까? 느헤미야를 통해서, 그런 인물이 우리 안에서 배출될 수 있기를 바라며,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아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느헤미야는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고,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선택되었지만, 느헤미야는 마음의 아픔을 통해서 부르심을 받았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먼저 돌아가 있던 하나니에게서 성벽이 없어서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이 이방인들과 들짐승들에게 보호를 받지 못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픔이 왔다. 죽을 만큼의 아픔이 왔다. 나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왔다. 예루살렘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왔다.

그래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서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해야겠다는 뜻을 정했다. 느헤미야의 경우를 보면, 자신의 전 운명을 걸어야 할 만큼 아프면, 즉 죽을 만큼 아프면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며칠 전 이 지역 Art Competition 에 다녀왔다. 340여 점 작품 중에서 상을 받은 작품들을 보니 테크닉 보다는 작가의 절실한 마음이 들어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그림을 통해서 작가의 마음을 읽어내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품의 의미를 본다. 작품 속에 들어 있는 작가의 절실한 아픔을 본다.

만약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면, 어떤 사건이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절절한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고, 그 아픔 때문에 뜻을 정하고,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그 때부터 그 일이 자신의 인생 사명이 된다.

기도하고 뜻을 정했으면, 흔들리지 말고 올곧은 길로 나아가야 한다
느헤미야가 뜻을 정했을 때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다. 독살이 난무하던 시대에 왕의 생명을 맡을 정도이니 느헤미야는 검증된 인물이었다. 왕의 극진한 총애를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느헤미야가 왕에게 예루살렘의 고통을 하소연하고 가서 성벽을 재건하게 해달라는 목숨을 건 간청을 올렸을 때, 아닥사스다 왕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왕의 관심은 온통 느헤미야에게 있었다.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라는 말로 느헤미야가 왕의 곁에 없는 것에 대한 염려만 하고 있을 뿐이다. 느헤미야 때문에 정치적인 결박을 풀어주고, 성벽을 건축할 수 있는 건축 자제를 지원해 주고, 군대와 마병을 보내주고, 느헤미야를 예루살렘 총독으로 임명해 주고, 빨리 성벽을 재건하고 자신에게로 돌아오도록 모든 것을 다 지원해 준다.

엄청난 신뢰다. 한 사람의 가치가 한 나라의 140년 묶은 정치적인 결박을 풀어냈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이런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160년 전, 혹은 140년 전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들에게 눈물로 쓴 편지가 있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남은 자가 되어 조국을 재건하라.’는 눈물로 쓴 하나님의 말씀을 다니엘이 받아먹었고, 에스겔이 받아먹었고, 그 눈물의 씨앗이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전해져서 느헤미야에게 이어진 것이다. 말씀이다. 말씀교육이 생명이다. 말씀이 흐르게 하면, 140년 후에 느헤미야 같은 인물이 우리 안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말씀교육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갈등을 풀어내야 한다
갈등이 없는 곳, 갈등이 없던 시대는 한 순간도 없었다. 그런데 그에 반하여 느헤미야 같이 갈등을 풀어낸 인물은 역사 속에서 항상 존재했다. 그러므로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고, 갈등을 풀어낼 수 있는 인물이 되고, 또한 갈등을 풀어낼 수 있는 저력 있는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가야 한다.

느헤미야가‘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건축해야겠다.’는 뜻을 정한 순간부터, 그에게는 생명의 위협이 끊이질 않았다. 느헤미야가 같은 뜻을 세운 1,773명과 함께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기다린 것은 산발락과 도비야였다. 산발락은 사마리아의 총독이었고, 도비야는 암몬 지역의 관장이었다.

그들은 이미 기득권을 잡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맹비난과 모독감을 쏟아냈다. 그럴 때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엎드려 기도한 후에 파수꾼들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게 했으며, 낮에도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한 손으로 일하게 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현실적으로 해야 할 성벽 공사하는 일에 전심을 다했다.

신앙의 양극단이 있다. 기도만 하는 것도 극단이요, 기도하지 않고 현실적인 일에만 집착하는 것도 극단이다. 건강한 신앙은 기도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어가는 것이다.

6장에 보면, 성벽공사의 마무리 단계에 도달했을 때,‘평화조약’을 맺자는 핑계로 암살할 계획을 세워놓고 오노평지에서 만나자고 4번이나 요청했다. 느헤미야는 그 회담에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럴수록 사람들과 힘을 모아서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온 힘을 다했다.

살해하려고 해도 안 되니까, 이번에는 악성루머를 퍼트렸다.“느헤미야가 사람들을 선동해서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다.”는 거짓말을 퍼트렸다. 6:8절에 보면,“이 일은 없는 일이요 너희 마음에서 지어낸 일이다”라고 밝혔을 뿐,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주여, 성벽재건, 주의 일 온전히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와 함께 성벽 건축에 더욱 집중했다.

마지막 시험은 거짓 선지자의 조언이었다. 적들에게 뇌물을 받아먹은 스마야라는 선지자가 찾아왔다.‘사람들이 당신을 죽이러 올 것이니 우리가 성전 안 하나님의 집에서 만나 성전 문을 닫읍시다. 그들이 그 밤에 당신을 죽이러 올 것입니다.’

치명적인 유혹이다. 성전은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느헤미야를 성전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그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감을 잃어버리게 하고, 백성들의 단결된 마음을 깨트리려는 유혹이었다.

느헤미야는 자기의 목숨을 구하려는 것 때문에 계명을 어기지 않겠다는 분명한 자세를 지켰다. 위기가 오고 급박할수록 올곧은 바른 길로 가야 한다. 지킬 것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

고난은 항상 온다. 고난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어떤 고난이 와도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인격을 기르자. 바로 이곳, 뉴질랜드가 느헤미야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는 옥토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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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관
크라이스트처치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이다. ‘오직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 모든 것들이 새롭게 살아나는 새로운 종교개혁을 꿈꾸며, 성경일독에 맞추어 ‘통성경 통설교’를 13회 동안 연재하면서 성경을 함께 읽으며, 같이 공감하고, 같이 깨닫고, 같이 울고 웃으며, 같이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