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나의 교구다 ” 존 웨슬리

0
258

I am no longer my own but yours. 저는 더 이상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Put me to what you will,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저를 붙들어 매시고,
Rank me with whom you will;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저를 붙이소서.

18세기의 사도 바울이라고 불려지는 존 웨슬리는 존 칼빈보다 200년 후인 1703년 6월 28일 영국 엡워드교구 목사 사무엘 웨슬리와 아내 수산나의 15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수산나는 친가의 독실한 종교생활 환경에서 자라나 그 믿음이 신실했다. 그래서 집안에 가정학교를 만들어 19명의 자녀들을 직접 가르치며, 자녀교육의 제일의 목표를 규칙생활로 정해 아이들의 방종을 제재함으로써 착실한 종교교육을 시켰으며, 바쁜 일상 중에도 매일 저녁 시간을 정해 놓고 개별 상담과 기도도 해주었다.

이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존 웨슬리는 나중에 자신도 시간을 5-10분 단위로 끊어서 사용하는 치밀한 사람이 되었고, 그런 그가 나중에 위대한 종교 지도자로 감리교(Methodist-조직적이고 치밀한 사람들)를 개척하게된다.

신학자이자, 근대 복음주의적 기독교 부흥을 이끈 그는 영국 성공회 소속이었으나 형식적인 신앙을 탈피하고 중생의 경험을 토대로 영국과 미국을 순회하며 뜨거운 은혜설교를 했고, 깨끗하고 경건한 생활로 사회개혁을 이루게 하였다.

영국사회를 믿음으로 구원한 믿음의 선구자 웨슬리는 다른 여타의 유럽국가들이 유혈혁명으로 타락된 산업혁명 이후 사회에서 벗어난 것과 달리 영국에 명예혁명이라는 영광스런 사회변혁의 중심적인 사상을 제공 한 사람이었다. 그는 개인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구원을 이뤄야 한다는 사회구원론의 효시였다.


존 웨슬리 하우스

존 웨슬리의 생애
존이 6세 되던 해인 1707년 2월 7일 목사관에 불이 났을 때 어렵게 구출되며 이 위험한 사건을 겪은 웨슬리는 어린 나이였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믿었고 그의 부모는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일을 시키기 위해 그를 구출 하셨다는 섭리와 소명을 강하게 느꼈다.

그 후 1725년 그의 나이 22세 때 그는 생애에 큰 전환기를 맞아 성직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사역 50년 동안 말을 타고 지구 10바퀴 이상 되는 거리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고, 하루 평균 32Km를 다니면서도 새벽4시에 기상해서 기도하고 설교를 4,000번 이상 했다.
이런 바쁜 중에서도 26권의 일기를 썼고, 200권 이상의 저서와 525곡의 찬송가를 만들었다.

지식과 경건을 하나로
웨슬리 신학은 성화를 중심으로 한 성령의 신학으로 하나님의 선행은총으로부터 시작해 회개, 칭의, 중생을 거쳐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실천적인 신학이다. 그가 이런 지성적인 회심이 이루어지게 한것은 이미 1735년 10월에 미국사역 길에 올랐을 때 모라비안 교도(체코의 얀 후스의 영향으로 세워진 교파)들에게 큰 도전을 받았고, 결정적으로는 1738년 5월 24일 8시45분에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읽다가 뜨거운 불의 체험을 하고 나서부터이다. 그전까지 그는 미완성의 회심이라고 할수있는 머리와 가슴중에 머리쪽에 더 가까웠다.

웨슬리는 옥스퍼드로 대변되는 세계와 올더스게잇(Oldersgate)으로 상징되는 두 세계에 다리를 놓은 접속의 신학자요 목회자라는 사실, 즉 아주 단적으로 말하자면 웨슬리는 개신교주의와 카톨릭주의를 화해시켰다.

웨슬리는 비록 개혁주의적 노선 위에 서 있었지만 개신교의 치명적인 약점 즉, 흔히 반 율법주의적 경향성(antinomianism)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인한 인간의 무력화 현상과 가톨릭적인 장점, 흔히 인간 편에서의 율법적인 구원협조(synergism)와 성결화 과정에 대한 강조를 받아 들임으로써 양자간의 갈등을 절묘하게 화해시켰다.

바로 이와 같은 절충주의적인 양상 때문에 웨슬리는 신교나 구교 모두로부터 오해와 공격을 당할 여지가 있었고 또 실제로 많은 공격을 받아 왔지만, 이와 같은‘웨슬리적 종합’이야말로 교회사를 그토록 오랫동안 양분해 온 이성과 체험, 자연과 은총, 의인과 성화, 믿음과 선행, 신학과 교회, 텍스트와 컨텍스트, 카톨릭주의와 개신교주의 등등의 모든 상극적 대립을 결정적으로 해소했다고 믿는다.


존 웨슬리 동상 앞에서

존 웨슬리의 영향
한국교회의 경우에도 교회제도는 칼뱅의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가 지배해왔기에 많은 교단들이 장로제도를 두고 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웨슬리의 경건주의적 복음주의가 한국교회를 지배해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한 신학은 자유주의도, 근본주의도, 신정통주의도 아닌 웨슬리의 경건주의적 복음주의였다.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속회나 구역예배, 부흥회 등은 모두 웨슬리의 전통에서 나왔다.

한국의 성도들은 뜨거운 은혜를 체험하는 ‘마음의 종교(religion of heart)’를 선호하는데 그것은 웨슬리에게서 나온 신앙 유형이다. 그 이유는 한국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나 언더우드가 모두 웨슬리식 경건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구원의 출발은 의롭다 하심과 거듭남으로 이뤄지고 구원의 완성, 곧 성화는 믿음과 행함으로 이루어진다.” 고 해석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필수조건은 믿음이요, 구원의 충분조건은 행함이다” 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타협하지 않는 영성으로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선언한 그의 선언대로 우리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우리의 선교 대상으로 삼고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