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색의 벽돌로 가지런히 놓여있는 한국의 흔한 길을 걷는다. 이제는 폭염도 지나고 서서히 가을을 맞을 준비를 한다. 이른 가을, 서울은 여전히 늦은 시간까지 사람들이 많고 자카르타나 상해처럼 참 부지런하다. 그렇게 한국인으로, 목사로, 청년과 청소년 다음세대 사역자로, 또 크리스천으로 길을 걷다 보면 길이 복잡한 것도 아닌데, 마음은 더욱 복잡하다.
다음 세대의 교회 때문만은 아니지만, 지난 10여년 간 들어온 교회에 대한 소리들 때문이다. 분명 하늘에 속한 교회가 아니며 믿음이 가득한 무게 있는 걸음들의 이야기도 아니며 오히려 매우 세속적인 이 땅의 교회들 이야기여서 귀 기울이고 싶지 않은, 또 마음에 그들에 대한 방 하나 두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거기엔 나도 있지 않은가!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세상 사람들, 미래, 삶과 신앙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는 교회 안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보기에는 목사인 필자가 속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물어오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땅의 일을 풀어 하늘 이야기로 설명해 주지 않는다면 이 시대는 이성적으로만 생각하지 믿음을 가지고 보는 것을 그만두고 말 것이며 심하면 포기해 버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이야기해야만 한다.
내가 속한 교회, 이를 보는 세상
한국교회에 몸담고 있는 젊은 목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성도의 숫자는 아닐 것이다. 바르게 직시하여 정직하게 본다면 영혼구원, 복음 그리고 변증하는 바른 자세이다. 이 셋은 모두 하나님나라의 복음 선포에 근거해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게, 혹은 교회의 문턱을 넘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세상과 젊은 이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와 같은 고민들은 교회의 오래된 과제이다. 특히 그 수가 하향하고 있는 이 시대는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무지한 변론을 하지 말라고 하셨고 동시에 우리의 믿는 바 소망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답변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 하셨다.
디모데후서 2장과 베드로전서 3장의 말씀 중 후자에 해당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베드로전서 3:15). 여기서 이야기하는 ‘대답하다’는 ‘변증하다’와 같은 어원을 사용하고 있다(Ravi Zachariahs).
그리스 철학이 가득했던 시대인 1세기와 같이 사도 요한의 복음적인 입장과 사도 바울의 선교적 사명의 열정없이는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어렵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교회는 ‘복음에 대한 확신’과 ‘선교에 대한 열정’이 회복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참된 제자들이 있는 거룩한 교회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시대 청년 청소년들은 말씀 속의 1세기 초대교회들 상황만큼이나 궁금한 것이 많은 시대이다. 착한 청년들은 묵묵히 조용히 궁금증을 보이지 않게 가슴에 품고 살며 소위 교회 안 말이 많거나 자주 따지는 청년들은 때론 과하게 접근해 올 때도 있다. 그저 조용히 웃으며 답해줄 뿐이다.
오랜 시간 주어진 일정의 성경공부 과제가 아닌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이를 풀어내는 것은 참 쉬운 일이 아닐것이다. 이 시대, 특히 고학력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믿음의 눈으로 앞에 다가올 시대를 소망을 가지고 바라보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
새신자반, 성숙자반, 리더반, 목장반, 제자학교 등의 프로그램들도 효율적으로 꾸준히 이어가야 하지만 어쩌면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어려운 환경에 있는 교회들은 이러한 프로그램보다는 진지하게 삶에 대한 변증을 나누고 함께 3시간이든 4시간이든 편안히 앉아 삶을 논하여 줄 줄 아는 형, 누나, 친구, 성직자가 필요한 이유이다. 젊은이 교회는 그러한 곳이 되어야 한다. 이야기가 살아있고 삶이 녹아있고 청년들과 젊은이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현대의 많은 기독교 변증가들은 초대교회의 사도들로부터 저스틴 마타와 어거스틴과 이그나티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아셀름과 같은 사람들을 이어 천국의 소망들을 이 땅의 언어들로 풀어 이야기 해주고 있다.
지난 세기로부터 지금까지 C.S. 루이스, 프란시스 쉐퍼, 오스 기니스, 알리스터 맥그라스,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 라비 자카라이야스 등은 복음을 들고 이 시대의 철학가들과 과학자 및 무신론자들과 이야기하며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충만하고 위대한 이야기들을 변증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들은 오늘의 청년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을 답해주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
복음이 살아 있으면 타인을 대하는 교회의 모습은 달라진다. 이러한 모습은 말이나 능력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 곧 예수그리스도 말씀과 성령에 가득한 교회들만이 가능한 모습이리라! 복음이 살아있으면 거리와 이웃에게 다가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고 어떤 형태로든 선교하기 위해 마음이 차오른다. 복음이 회복된 교회들은 꼭 그렇다. 전통적인 방법의 거리전도이든 친구나 이웃과 함께 오랜 시간 인내로 하는 관계를 통한 변증전도이든 거리낄 것이 없다.
한가지 궁금증
한 청년이 카페 모임에서 질문을 한다. 많은 질문들 중에 “이러한 (변증, 철학과 같은) 이야기들이 교회와 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와 “교회는 이런 것에 관심이 있습니까?” 였다. 같은 내용의 다른 질문들이었다. 그 청년의 말은 교회가 사회와 철학, 과학, 문학, 역사 등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교회가 신앙 밖 이야기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것 같은 매우 변증적이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신앙성장의 문제이면서 복음선포와 선교의 문제이다. 오스기니스는 로잔선교대회에서 오늘 교회가 품어야 할 6가지 과제를 이야기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 우리 교회는 사회가 당면한 과제들을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또 협력하여 어깨를 나란히 하고 타이타닉 호와 같이 생명의 복음에 영향을 주거나 급변하는 세상의 흐름들과 씨름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방법들을 살피고 이해하여 우리의 젊은 이들을 끌어 안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증은 영혼구원의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변증과 변증전도는 관계 전도뿐만 아니라 이시대 청년들의 예수 제자화의 첫 단추이다. 이제 기독교 변증은 청년사역에 있어서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 아닌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인 셈이다. 복음이 100%이어야 하고 시대에 대한 이해 또한 100%이어야 한다. 이는 교회가 울타리를 넘어 세상을 만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다는 말씀,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이 아름답다는 말씀과 같다.
주여 우리 젊은이들로 시대를 알고 복음을 품어 거리로, 대학가로, 생명의 말씀을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다가가게 하소서. 주는 우리의 생명이시다 라고 잘 설명하고 인내하며 기쁨과 사랑으로 말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