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누구 없수?

0
114

언년아, 일어나~. 언년아~일어났니. 새벽 같이 안방마님의 걸걸한 소리가 집 안팎을 울린다. 안방에 군불 지피거라. 큰 솥에 물도 넉넉히 붓고 쌀도 씻어라. 아, 그리고 성미함에 성미 담는 것 잊지 마라. 찬바람이 부는 가을 녘이나 겨울절기면 고인이 되신 모친은 해수병(만성 기침)으로 고생하셨다. 먼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에 콜록콜록 기침을 하시면서 새벽을 깨우셨다. 혼기가 꽉 찬 작은 이모가 모친을 도와서 가사일을 돌보고 있을 때이다.

그 당시(1953~1957) 미국에서는 미공법 480조(저개발국에 잉여농산물 제공)에 의하여 최빈국에다 밀가루, 옥수수가루, 우유가루를 제공하고 있을 때이다. 매달 한 번씩 배급 일이면 공회당 마당은 배급의 행렬이 장사진을 치곤 한다.

마을 초등학교 창고에는 미리 배당 받은 구호품목들이 바리바리 쌓인다. 점심때가 되면 창고 안이나 학교 뒷마당 언저리에는 큰 까만 가마솥이 걸린다. 옥수수 죽을 쑨다. 우유를 끓인다. 장마당이 따로 없다. 북새통이 되곤 한다. 죽을 쑤고 우유가 끓여져서 먹을 만 해진다. 어느새 마을은 구수한 냄새로 시장기가 감돈다.

큰 가마솥 주변으로 코흘리개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든다. 오전수업을 마친 신입생 1학년들이 앞장서면서 급식 줄은 구불구불 몇 순배를 돈다. 각자 준비한 양은식기에 죽 한 그릇씩을 받아 든다. 학교 추녀 밑이나 아카시아 나무 밑은 금새 식당이 되곤 한다. 학교 뒷마당은 어느새 읍내 시장통의 먹거리로 변한다.

부엌 한 켠의 성미함이 가득 찰때면 모친은 작은 포대에다가 옹기종기 성미를 담는다. 점원으로 일하는 아재의 과업이 시작된다. 동네방네로 필요한 가정에 양식으로 나누곤 한다. 이 성미를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나가면서 교회입구에서 본다. 그 성미함은 때로는 항아리이기도 하고 쌀자루이기도 하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헤어질 때면 심방전도사님이 교회출구에서 누런 빈 봉투를 어김없이 돌리곤 한다. 성미봉투를 의무적으로 시행하던 시절이다. 이 성미가 배고픈 가정을 살린다. 절망 가운데 있는 가정들에 기적의 선물이 된다. 성미 전달이 활발해질 즈음에 19공탄이 등장한다.

교회 뒷마당은 검정공(19공탄)들이 줄을 지어 선다. 새끼줄에 바리바리 꿰어진 19공탄은 다리 밑으로, 달동네 무허가 판자촌으로 날라진다. 6.25 전쟁후의 재건의 시절이라 모두가 어렵고 힘들었다. 그러나 인심은 따뜻했고 희망은 반짝 반짝인다.

고국에 나도는 신조어 중에 골드이모(삼촌)가 있다. 결혼과 출산을 뒤로 미룬 경제력을 갖춘 이모, 고모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조카들이 어릴 때는 유아용품을 사준다. 초등학교에 다니면 책이나 학용품을 사준다. 중고등학생이 되면 용돈 몇 만원이 건네진다. 이것이 구시대의 고모, 이모, 삼촌의 조카 사랑이다.

그런데 근자에는 조카사랑이 진화하고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조카를 위해 매달 30만원씩 적금을 넣는다. 책값에, 과외비에 목돈이 많이 드는 시대이다. 필요할 때 바로 바로 지원해 주기 위한 사전준비이다. 이름하여 조카통장이다.

고국 부산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은행 고위직에 있는 골드이모(52세 미혼)가 여대생인 조카(24세)가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는데 5백만원을 교육비에 보태라고 주었다. 가히 조카바보라 부를만하다.

이들의 조카사랑은 이것이 다가 아니다. 조카통장 만들기, 조카펀드 들기, 특별선물준비, 진로상담, 해외여행 비용부담까지 말 그대로 제2의 부모 역할이다. 한국사회문제연구원장은 ‘골드 이모’현상을 이렇게 진단한다. “자녀를 갖기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아이에 대한 애착을 느끼고 싶은 본능이 조카 사랑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혼인과 출산율이 감소할수록 골드 이모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며칠 전에 지인과 식사 중에 오고 간 얘기이다. 칼리지 고학년이 되면서 공부에 재미를 붙인 둘째 딸 얘기이다. 학습이 어려운 과목을 택해 놓고 따라 가지 못하는 딸이 넘 가엾단다. 싱글 맘인 그녀도 풀 타임으로 일한다. 대학을 졸업한 딸도 생활전선에서 풀 타임이다.

모녀의 주급을 모두 모아도 렌트비에 생활비에 일주일을 살기가 빠듯하다. 모처럼 공부에 열심인 딸을 일주일에 한번만이라도 특별수업을 받게 할 수만 있다면 한다. 학습부진을 덜기 위한 학습은 꼭 필요하다. 한번에 필요한 수업료가 40~50불이면 되는데……

얘기가 오가면서 내내 마음이 무겁다. 10명이 커피한잔씩을 절약하면 학생 1명을 도울 수 있는 멋진(?)장학재단이 된다. 교민2세 육성 차원에서 학습부진 학생들을 도울 수 있는 다양한 시도는 있어야 하지. 거기 누구 열명 없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