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적 선교적교회의 특징,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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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로우 신학교에서 선교적교회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과정을 마친 때가 벌써 10년 전이다. 그 당시만해도 선교적교회에 대한 연구들이 점점 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그 후로 계속해서 선교적교회에 대한 책들과 강의들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책들이 나오고 선교적교회에 대한 연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선교적교회 공동체를 대표하고 모범이 될만한 교회 공동체를 찾는 것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이것은 다른 면으로 본다면 선교적교회에 대한 이론은 아주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모습을 갖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이 검증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도 그럴 것이 선교적교회는 사실 어떤 프로젝트가 아니다.

아니 절대로 교회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프로젝트가 되면 안 된다. 그래서 좀 아쉽지만 선교적교회에 대한 실제 적용의 길은 생각보다 많이 기다려야 하고 또 많은 시행착오를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지난 2월에 20년간 살던 오클랜드를 떠나 웰링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데는 이 선교적 공동체에 대한 나의 실험적인 모험심이 크게 작용했다. 선교적교회 공동체에 대한 열정도 남 못지않았고 선교적 교회에 대한 오랜 연구도 나름 열심히 해왔다.

하지만 이제 6개월째에 들어선 웰링턴의 새로운 교회공동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선교적 교회 공동체로의 방향을 잡아가는 데는 아직도 솔직히 갈팡질팡하고 있다.

이렇게 선교적교회의 실제적 적용에 대하여 갈급해하며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뜻밖에 아주 유익한 강의가 찾아왔다. 몇 주전 코람데오신학대학원에서 고신대 송영목교수를 초빙해서 진행되었던 신약신학강좌였다.

당연히 신약에 대한 전반적인 신학들을 논하는 자리였는데 흥미롭게도 그 강의 중에 한 주제가 선교적 성경읽기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 사도행전을 선교적으로 읽으며 선교적교회의 모델을 정리한 학자들을 소개받았는데 그들이 에스비 베반스(S. B. Bevans)와 알피 스크로더(R. P. Schroeder)이다. 송교수는 선교적 성경읽기를 통해서 이 두 사람이 제시한 선교적교회의 특징을 7가지 단계로 설명해나갔다.

첫 번째 단계가 바로 공동체 형성이다. 사도행전에 세워진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선교적으로 읽다 보면 그 교회공동체가 어떻게 처음 형성되는가 하는 부분에 멈추게 된다.

흥미롭게도 그 첫 번째는 바로 주님의 명령에 따라 묵묵히 ‘성령님’을 기다리는 ‘기다림’에서부터 출발한다. 선교적 공동체는 기다림을 통해서 형성이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가장 못하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기다림이 아닐까?

그런데 오히려 교회공동체가 정말 선교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약속대로 그리고 성령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기다리는 일이 가장 첫 번째 단계로 필요한 것이라고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선교적 읽기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잘 기다리는 사람들일까? 17년전 5월 3일 밤이었다. 오후부터 조금씩 아내가 진통을 시작했다. 신기하게 5월4일이 내 생일이기도 하고 뱃속에 있는 세 번째 아이의 예정일이기도 했다.

우리는 첫 번째도 아니고 벌써 세 번째 출산이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출산에 대한 노하우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노하우보다 기대감이 많이 준 것일 수도 있다. 남들도 두 명 정도는 대부분 많이들 낳는다. 그러나 세 명은 사실 예상하지 않았던 숫자였기에 처음부터 그렇게 많이 기다리거나 기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랬을까? 한국에서도 산간을 도와주러 올 수 있는 가족이 아무도 없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우리는 그 당시 참석하던 키위교회 목사님과 사모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저녁 늦게 두 분이 흔쾌히 찾아 오셨다. 우리가 병원을 간 사이 아직 어린 첫째와 둘째를 돌봐주시기 위해서였다.

병원에 도착하여 계속 진통 간격을 체크했다. 미드 와이프는 진통 간격이 어느 정도 좁혀오자 미리 예약한 대로 수중분만을 하기 위해 옆방 욕조에 물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예정대로 아이가 나오기만을 밤을 새우며 기다렸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진통이 점점 약해진다. 아내와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새벽이 되었을 때 미드 와이프는 아내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한마디 했다. 그냥 한숨 푹 자고 일어나라는 것이다. 아내가 잠든 동안 나도 편한 마음으로 집에 다녀올 수 있게 허락해주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급하게 집에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몸집이 커다란 우리 사모안 목사님은 거실 바닥에서 이불도 없이 자고 계셨다. 그리고 방에서는 밤새 엄마 아빠 없다고 난리를 쳤을 첫째와 둘째를 안고 사모님이 자고 있었다.

밤새 얼마나 힘들었을까? 너무나도 미안하고 또 고마운 마음으로 두 분을 보내드리고 분주하게 아이들을 준비시켜 유치원에 보냈다. 그리고 다시 찾아간 병원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내가 혼자 잠들어 있었다.

오늘이 예정일인데 오히려 진통은 아예 없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짐을 챙겨 퇴원을 하는데 수중분만을 하겠다고 한가득 받아놓은 욕조가 미안한 마음을 더하게 만든다.

그렇게 셋째 녀석은 유난을 떨고 예정일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다시 진통이 왔고 결국 온 주변 사람들의 기다림과 관심 속에서 세상에 얼굴을 보여주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기다림의 일주일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우리 부부는 첫째, 둘째 못지 않게 더 간절하게 기다렸다. ‘혹시 오늘일까? 혹시 오늘은 아닐까?’ 매일 매일이 간절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아 더 늦으면 안 되는데?’ 우리는 오히려 그 고통스런 출산의 시간이 빨리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기다림의 시간은 결국 생명이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 번째로 주실 그 생명을 간절히 기다리며 한주간을 벅차게 보낼 수 있었다. 어쩌면 기다림은 그 자체가 큰 유익인지 모른다.

선교적교회는 기다림의 단계를 통해서 공동체를 형성한다. 마치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제자들이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며 매일같이 모였던 것처럼 선교적교회는 기다림의 단계를 거쳐야만 제대로 형성이 되어질 수 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교만이 녹아지는 시간이다.

또 교회공동체가 오직 주님의 약속과 성령님의 오심으로만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는 시간이다. 이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서 교회공동체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철저히 순종할 수 있는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 기다림의 시간이 없이는 교회공동체가 실수를 한다. 특별히 공동체가 급하게 잘 성장할수록 더 크게 실수를 한다. 성령님이 아닌 사람이 이끄는 모임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간절한 기다림은 선교적교회 형성에 꼭 필요한 첫 번째 단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