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밤에 만난 사람

산골마을이라 겨울 해가 노루꼬리 같았다. 골목 안은 어두음이 으슴푸레 묻어난다. 찬바람이 휘감고 지나가는 골목마다 적막이 또아리를 튼다. 가물가물하는 남포불을 따라 삼삼오오 모여 온다. 마을초입부터 짙게 풍겨 오는 무엇이 있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냄새는 구수하다. 콧 끝에 전해오는 냄새가 발길을 잡아 끈다. 아궁이를 가득 채운 장작불이 벌건 혀를 내두른다. 서말드리 검정 무쇠 솥에는 물이 펄펄 끓는다.

길고 투박한 작대기를 들고 설치는 김서방의 발길이 부산하다. 구수하고도 담백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흰 사발에 고봉으로 밥을 먹은 지가 한식경이다. 입안에 가득 고인 침들이 시장기를 불러 온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림에 목이 반쯤은 나왔을 시간이다.

네 개의 짧은 다리에 긴 나무상이 펴진다. 얼음이 둥둥인 물 김치가 나온다. 뒤이어서 김이 무럭무럭나는 메밀 막국수 한 그릇이 저마다 돌려진다. 누가 먼저라 것도 없이 후루룩 후루룩 맛있게도 먹는다. 농한기에 맛보는 산골 한 밤의 별미이다. 막국수 기계에서 쭈르르 흘러 나오던 국수 발이 눈앞에 삼삼하다. 막국수 냄새에 짙게 배인 인정이 있었다.

땀냄새가 짙게 배인 남정네들의 등짝은 듬직했다. 사람냄새가 방안 가득했다. 나의 조국, 나의 고향 말의 겨울 밤의 졍겨운 추억이다. 추억은 겸손을 가르친다. 추억은 그리움을 가져다 준다. 추억은 가슴 한 켠을 시리게도 하고 따뜻하게도 한다.

예년보다 일찍 온 뉴질랜드의 겨울은 습기가 많다. 냉기를 머금은 바람은 코트 깃을 세우게 한다. 가로등이 불침번을 서는 타운 골목에는 썰렁한 바람이 밤나들이를 한다. 초저녁부터 불이 꺼진 창가에는 고독이 서릿발을 세운다. 간간이 지나는 승용차의 불빛이 고요와 적막을 깨운다.

빛바랜 앨범을 뒤적임도 지루하다. 카카톡으로 친지와의 소통도 잠시이다. 텔레비전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보아도 별로 재미가 없다. 모바일도 던지고 텔레비전의 리모콘도 던져 버린다.

쇼파의 쿠션을 베게 삼아서 카페트 위에 길게 눕는다.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했던 피로감이 밀려 든다. 방금 만난 멋진 신사가 피곤을 저만치 밀어 버린다. 뒤척이던 몸을 일으키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린다.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지금까지 무엇을 했나. 내가 방금 만난 그 이와의 소통을 시작한다.

실례지만 성함을 여쭙니다. 찰스 피니라고 하오. 혹자는 척 피니 라고도 부른다오. 국적은 미국이오. 정확히 말하면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요. 나이는 만86세. 직업은 기업인이요. 사람들은 나를 자선사업가라고 말하지요. 10대 시절부터 돈맛을 알았다오. 난 정말 돈을 좋아했어요. 샌드위치를 팔아서 돈을 차곡차곡 모우는 재미가 솔솔 했다오.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세계 최대의 공항 면세점(DFS)을 창업해서 40대에 억만장자 반열에 올랐어요.

나는 부자가 되어서도 근검하고 절약 했지요. 회사 직원들에게는 종이 한 장도 아끼라고 잔소리를 했지. 한번은 사무실에서 휴지통을 무심히 봤어. 그래서 한 소리 했지. 이제부터는 서류 한 장도 양면지로 사용하라고 말이지.

지금 생각하면 직원들에게 못할 짓을 했어. 그러나 난 아낄 때는 아꼈어. 남들이 지나치다고 할 정도였지. 누군가는 이런 나를 지독한 구두쇠라고 하더라고. 지금도 임대주택에서 살아. 승용차도 운전사도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비행기를 탈 때면 이코노미석을 이용하지.

1984년에 아틀란틱 자선재단을 만들었어. 미국을 비롯해서 아일랜드, 필리핀, 베트남, 쿠바 등에 의료와 교육분야를 지원했지. 난 메스콤을 타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싫어해. 그래서 기부재단 본사도 영국령 버뮤다에 두었지. 후원을 받는 모 단체에서 언론에다가 선행을 알리겠다고 했어. 알리면 기부를 끊겠다고 엄포를 놓았지.

나의 어머니는 좋은 일은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하셨어. 드러내면 상대방이 부담을 느낀다는 것이지. 어머니는 지혜로운 분이셨어. 그래서 나의 기부철칙도 드러내지 않는 것이지. 핫핫핫!

그런데 나의 선행이 몽땅 까발리는 사건이 터졌다오. 1997년에 내가 키웠던 체인을 매각했어. 세무조사 중에 숨겨진 회계장부가 나왔어. 기자들이 특종을 잡았다고 몰려 왔어. 그들 앞에 까발렷지. 15년간 기부했던 기부금 내역을 적은 장부였어. 15년간 2,900여회를 기부했고 기부금의 총액은 40억 달러규모였지. 모두들 뒤로 자빠지더라고.

메스콤이 연일 나의 선행을 세상에 알리는데 넘 부담이었지. 진정한 선행은 드러 나지 않는다. 재산은 모아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써야 한다는 것이 어머님의 가르침이였어. 난 정말 돈을 좋아하지만 돈이 내 삶을 움직이지는 못하더라고. 내가 기부하는 진짜 이유는 내가 필요한 것보다도 많은 돈이 생겼기 때문이다. 죽어서 기부하는 것보다도 살아서 기부하는 것이 훨씬 즐겁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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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만
춘천교대와 단국대 사범대 졸업. 26년 간 교사. 예장(합동)에서 뉴질랜드 선교사로 파송 받아 밀알선교단 4-6대 단장으로 13년째 섬기며, 월드 사랑의선물나눔운동에서 정부의 보조와 지원이 닿지 않는 가정 및 작은 공동체에 후원의 손길 펴면서 지난해 1월부터 5메콩.어린이돕기로 캄보디아와 미얀마를 후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