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떠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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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고 불리우는 극동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지도 어느새 열흘째다. 코리아 역사책에도 종종 등장하는 익숙한 도시 블라디보스톡. 민족의 독립을 위해 온 삶을 내던졌던 한민족 선조들의 피와 얼이 깊이 새겨진 이 땅에 꼭 와보고 싶었다.

바로 이 날을 위해 준비해 온 한국 시장표 감색 개량한복 상의와 카트만두(Kathmandu) 반바지를 맞춰입고(?) 아주 특별한 여행길을 위해 블라디보스톡 기차역으로 향했다.

모든 여행자들의 로망이라고 불리우는 그 이름도 찬란한 시베리아 횡단열차! 얼마나 기다렸던가 너의 품에 안겨 러시아 광활한 벌판을 달려보기를! 가슴은 두근두근, 양손엔 도시락 컵라면과 초코파이가 가득한 비닐봉다리를 들고 생의 첫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으로 입성했다.

앞으로 69시간 동안 나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2등석 칸은 창가를 중심으로 두개의 이층침대가 나란히 마주하고 있는 4인실 침대칸이었다.

아시아와 맞닿은 동쪽끝 블라디보스톡역에서 유럽 대륙으로 이어지는 서쪽끝 모스크바역까지의 거리는 무려 9334km. 7박 8일이 걸리는 대장정이다. 하지만 나의 종착역은 모스크바가 아닌 카자흐스탄과 맞닿은 옴스크(Omsk)이기에 6,000km 정도만(?) 달리면 된다.

나의 룸메이트는 누구일까 궁금 불안. 사납고 거친 러시아 형님들을 만나면 그것도 나름 추억이 되겠지만 아무래도 첫 횡단열차 여행은 잔잔하게 고독에 잠겨 조용히 가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열차가 출발하기 10분 전, 매서운 눈을 가진 금발의 한 젊은 러시아 사내가 내 칸으로 들어왔다. 내 얼굴을 쓰윽 흝더니만 그다지 반갑지 않은듯 미소도, 비웃음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내 맞은편 침대칸에 털썩 앉았다. 그의 손에 쥐어진 별이 달린 범상치 않은 초록색 베레모로 미루어보아 이 사내는 러시아 군인임이 분명했다.

첫인상은 차갑기 그지 없지만 앞으로 69시간 동안 함께할지도 모르는 이웃이기에 어떻게든 어색함을 극복하고 이 사내와 말을 터야한다는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내가 먼저 한국에서 배워온 간단한 러시아어 인사와 함께 웃음으로 악수를 건넸다.

“즈드라스부이째! 미냐 자붓 두루(안녕, 내 이름은 두루야)”

어눌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나의 러시아어가 먹혔는지 이 사내가 씨익 웃음을 지어보이며 손을 내민다.

“미냐 막스(난 막스야)”

이렇게 러시아스러울 수가. 그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직업군인으로 새롭게 발령받은 도시인 시베리아의 ‘울란 우데(Ulan Ude)’로 향하는 23살 젊은 남편이자 한달 뒤 첫 딸의 출산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예비아빠였다.

첫인상이 무뚝뚝하고 차가워서 그렇지, 러시아 사람들은 잘 알고보면 참 인간미와 정이 넘치고 묘하게 시크한 매력이 있다. 막스도 그 부류였다. 영어실력은 한국 초등학교 2학년 수준 정도였지만 2주간 속성으로 개인과외를 통해 배워온 나의 생존 러시아어와 손짓발짓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깔깔대며 농담을 주고받는 룸메이트 사이가 되었다.

막스는 러시아 군대에서 즐겨 한다는 묵찌빠와 비슷한 손바닥 모션 게임을 가르쳐주었다. 이긴 사람은 진 사람에게 인정사정없이 풀스윙으로 손등을 찰지게 때려주는 벌칙이 포인트인 이 게임을 라이트웨이트 복싱선수인 막스와 진지하게 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카드게임도 하고 공책과 펜으로 오목도 두다가 저녁이 되자 배가 출출해졌다. 야참 시간이 되자 한국인의 정을 담아 초코파이 한박스와 러시아 국민라면인 ‘도시락’ 컵라면을 두개 꺼내 보였지만 막스는 손을 저으며 ‘넣어둬~’ 말하는듯 하더니 자신의 커다란 군인가방자루에서 큼직한 도시락통을 꺼낸다.

만삭인 그의 아내가 사랑하는 남편을 타도시로 떠나보내며 지난밤 눈물 흘리며 정성스레 준비했을 이 사랑 가득한 러시아식 도시락 진수성찬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뭉클하다.

이제부터 이곳을 ‘시베리아 감동열차’라고 명할찌어다! 막스의 아내가 준비해준 도시락 통에는 러시아인들이 즐겨먹는 으깬 감자, 소시지, 치즈, 오이, 당근, 빵, 그리고 각종 캐러멜까지 두명이서 두끼를 나눠먹기에도 충분한 양이었다.

방안의 불이 모두 꺼지는 한밤중엔 막스의 노트북 안에 담긴 러시아 드라마를 시청했다. 러시아의 대표 간식 ‘쎄미치키(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막스가 웃는 타이밍에 나도 그저 따라 웃어본다. 흐하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맞이하는 첫날밤, 이 정도면 웃고 즐거워하기에 충분한 여행이지 않을까!

아침이 밝았다.목적지까지 가려면 아직도 시간 변경 선을 3번이나 더 지나야 한다고 하니,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스케일은 가히 인크레디블 하다.

첫날엔 창밖의 모든 풍경이 신기했는데 비스무리한 황량한 벌판과 종종 나타나는 강과 밭들이 이제는 더이상 흥미롭지 않았다.

그럼에도 새로운 풍경이 있지 않을까 바라본 유리창에 문득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비춰졌다. 오, 서울 병상에 누워계신 사랑하는 외할머니의 얼굴이다.

“흐윽… 할머니, 저 잘 먹고 다녀요. 빨리 나으랑께!” 뜬금없이 센티멘털해지는 패밀리 타임도 잠시, 순간 좀 억울한 마음이 찾아들었다.

‘아니, 이렇게 낭만적인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달리면서도 왜 떠오르는 여인의 얼굴이 애인도, 여자친구도 아닌 외할머니어야 하는가! 하…’

오후가 되자 두명의 다부진 체격을 가진 러시아 군인들이 우리 방에 합류했다. 이로써 모든 침대가 꽉 채워진 완전체 칸이 되었다. 두 명 모두 키가 190cm가 넘어보인다. 짧은 금발스포츠 머리에 올림픽 대표팀스러운 근육질의 체구는 강한 러시아 남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체격은 가장 작지만 눈매는 가장 매서운 막스가 군인들끼리 통하는 언어로 인사를 주고받는듯 하더니 곧이어 한없이 여유롭고 거만한 자세로 동생들 대하듯 대화를 이어간다.

뻔하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막스와 국경수비대 신병들인 이 두 어린 친구들의 계급, 클라스의 차이였다. 두 신병 아르쫌과 블라디미르 역시 걷보기엔 무겁고 단단한 탱크같아 보였지만 말을 섞고 보니 이제 막 20대가 된 장난끼 많은 동생들일 뿐이었다.

세 명의 러시아 군인들과 합숙하며 나누었던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끈끈한 추억이 지금도 때론 그립다. 겉으로 사람을 판단해선 안됨을 선명하게 깨닫게 해준 정많고 따뜻한 러시아 군인 동생들과의 합숙 여행.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기 위한 교통수단이라기 보다는 러시아를 가장 러시아답게 여행해볼 수 있는 움직이는 여행지다. 수년후 다시 열차를 탔을때 귀여운 어린 딸과 아내와 동행한 막스와 또 같은 칸에서 만날 수 있을까?

그때는… 내 옆에도 아름다운 ‘나의 그녀’가 함께 하고 있기를!
막스! 스파씨바(고마워)! 빡가(또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