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시내 아파트 주민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루터 동상
교황이 온 유럽을 다스리고 있던 중세시대 1,000년을 타락하고 부패한 암흑기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은 여러 가지 신학적, 교회적, 윤리적 악습들이 난무하고 진리가 어두워지고 교회가 타락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당시 교황권의 지배를 받던 모든 사람들이 교황 제도와 교황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 불평했는데 독일 교회가 적극적으로 교황제도로부터 자유와 독립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기를 원했다.
이처럼 중세는 교회의 부패와 교황의 권위로 가득했지만 어두움을 물리칠만한 구원의 빛이 보이지 않자 하나님은 그 어두운 중세시대를 마무리하시기 위해 독일의 한 젊은이를 부르셨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지배하는 세상에 태어났다(1483-1546).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를 가다
독일에 가면 루터의 도시라 부르는 곳이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루터가 사역했던 비텐베르크와 다른 하나는 루터가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한 곳 아이스레벤이다.
베를린에서 비텐베르크까지는 기차로 달리면 50분 정도 걸린다. 비텐베르크는 1938년부터 공식적으로 ‘루터의 도시’가 됐다. 16세기만 하더라도 이곳은 정치,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다.
16세기 초(1502년)에 작센의 선제 후 프리드리히 3세는 인구 2,000명에 지나지 않은 이곳에 대학을 설립했다. 그 시기에 에어푸르트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루터는 1505년 6월 2일 천둥번개가 치던 들판을 지나다가 두려움에 떨면서 “살려만 주시면 사제가 되겠다”고 약속한 후 이곳으로 와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스승 요한 슈피우츠의 뒤를 이어 교수로 임명됐다.
15-16세기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이자 로마 카톨릭의 쇠퇴기였다. 십자군전쟁의 패배, 동서교회의 분할, 교황들의 전횡으로 말미암아 이미 교황권에 대한 반항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때였다. 이미 이탈리아에서는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족벌주의와 탐욕에 반기를 들고 도미니코 수도회의 사보나롤라가 내란을 일으켰으며 북부에서는 얀 후스, 위클리프, 히에로니무스가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고 교황과 성직자들의 세속화를 강력하게 비판하던 때였다.
그럴 즈음에 교황 레오 10세의 베드로 성당의 건축비 충당과 막데부르크 대주교 알브레히트의 사욕이 전대사를 조건으로 한 면죄부를 남발한다.
루터가 비덴베르크 성 교회에 붙였던 95개 반박문 동판
그래서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 궁정교회에 정문에‘면죄부 능력 천명에 대한 반박’이란 제목으로 95개 조항의 대자보를 붙여 종교개혁을 촉발시킨다.
루터하우스 정원에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는 여인의 동상이 있는데 루터가 “프랑스와 베니스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다” 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이다. 원래 수녀였던 그녀는 루터에 감명 받아 다른 수녀 8명과 함께 수녀원에서 탈출해 비텐베르크로 와서 적극적인 구애로 농민 전쟁이 한창이던 1525년 루터와 결혼을 한다. 체구가 작은 카타리나는 매우 억척이어서 대식구를 거느린 가난한 살림을 옹골지게 꾸려가며 루터를 내조했다.
종교개혁과 독일의 농민전쟁
중세 말기부터 서서히 진행된 자본주의는 영주와 지주, 소작농의 대립을 가져왔고 자본가의 착취가 갈수록 심해졌다. 1525년에는 독일 전역이 흉작인데도 영주의 가혹한 착취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독일의 농민들은 루터의 동역자였던 토마스 뮌처의 영향을 받아 영주들의 착취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과감히 맞섰던 루터가 자신들을 지지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루터는 농민전쟁이 윤리적, 도덕적, 합법적인 차원을 벗어난다하여 그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래서 일찍이 멜란히톤과 함께 루터를 도왔던 토마스 뮌처는 농민들과 함께 소규모 봉기를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도주하여 파이퍼와 더불어 농민 속에 들어가서 농민을 지도하기 시작하고 ‘신의 영원한 동맹’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에 농민과 도시 가난한 민중이 대대적으로 참가하여 마침내 봉기를 일으키며 독일 농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농민은 영주들의 군대 앞에 무기력했다. 그래서 농민전쟁은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약 10만의 농민이 공주 우금치 전투 싸움에서 일본군의 기관총에 무참하게 학살당한 동학농민군의 처참한 모습처럼 저들도 학살되고 끝이 난다.
파문 이후 숨죽인 마르틴 루터
루터가 독일 아이제나흐 인근의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서 개혁의 칼을 갈았던 시기는 루터가 파직 칙서를 받고 보름스 국제회장에서 입장을 밝힌 뒤인 1521년 4월부터 1522년 3월까지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을‘나의 밧모섬’이라고 한 것은 사도요한이 로마 황제의 박해로 인해 유배 되었던 곳에서 요한계시록을 받았던 것처럼 그는 자신이 속한 종교의 기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한 때 사역했던 카톨릭이 연회를 열고 호화로운 교회를 세우는 데 거금을 펑펑 썼고 돈으로 성직을 거래하던 것에서 루터는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용기 있게 외치게 되었다.
이 시기 루터는 고립과 고독에 시달리고 그의 생애에서 전혀 움직임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가장 창조적인 시간이었다.
루터의 개혁을 도운 인쇄기
루터는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종교개혁의 방향에 대해 고민했고, 편지와 강론집, 논문 등 다양한 글을 쉼 없이 썼으며, 독일 민중들을 위해 성경을 번역했다. 아직도 루터하우스 전시실에는 루터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인 독일어번역 성경 구텐베르크 판본 등 그가 남겨놓은 흔적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 큰 밑거름과 함께 이후 펼쳐지는 종교개혁은 위기에 처한 우리 사회에 변화와 교회개혁의 메시지를 던진다는 점에서 지금도 의미가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