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를 제5 복음서라고도 한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최소 700년 전에 이미 메시아에 관한 기록을 고스란히 담아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5왕의 시대를 거치면서, 약 60년 동안 하나님 말씀을 전달했다.
전승에 의하면, 므낫세 왕에게 톱으로 켬을 당하여 순교했다고 한다. 이사야가 그토록 간절하게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다가 결국에는 최종적으로 메시아의 출현으로 구원받을 수밖에 없음을 선포했다.
그렇다면, 이사야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에 대해서 어떤 증언을 하고 있을까?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메시아는 어떤 모습일까?
져 주러 오셨다
이사야는 예수님을 ‘고난 받는 종’이라고 표현했다. 종으로 오셨고, 종으로 사셨고, 종으로 죽으셨다. 종이란, 자기 권리가 없다. 오직 자기 주인만을 위하여 살거나 죽는 존재이다. 이사야서 안에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가 4번 나온다.
첫째,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하는 분 (42:1-9). 둘째,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시는 분,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으시는 분, 관원들에게 종이 되신 분(49:1-7). 셋째, 자신을 때리는 자에게 등을 맡기며, 자신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자신의 뺨을 맡기는 분(50:4-9).넷째,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갚아주기 위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53:7)으로 소개하고 있다.
‘고난 받는 종’, 화려한 삶을 살거나, 높은 인기를 얻거나, 큰 권세를 발휘하여 사람 위에 카리스마적인 권위로 군림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서 백전백패 져주시는 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것이 예수의 길이요,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달라진다. 안 지려고 악착같이 싸우던 사람들이 맥없이 져주는 사람으로 변화된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져주면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샘물이 터진다. 희한하다. 체험해 볼 수 없는 기쁨이 솟아오른다.
자존심 때문에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고 버틸 때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왜 기쁨이 없을까? 안 죽어서 그렇다. 안 죽으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하여, 영혼구원을 위하여 죽기로, 깨지기로, 낮아지기로 작정하면 겉잡을 수 없는 기쁨이 몰려온다. 해방이다. 자유다.
대신 갚아 주러 오셨다
마른 땅에서 돋아난 연한 순과 같이 비폭력으로 대신 갚아주러 오셨다. 예수 믿으면 변화된다, 사람을 죽이는 자 사울이 사람을 살리는 자 바울로 변화된다, 돌을 들던 자가 돌에 맞는 자로 변화된다.
신앙의 결실은 성품의 변화이다. 성품이 순한 양으로 변하는 것이 진정한 성령 충만의 결과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종이 실제로 마른 땅에서 돋아난 연한 순같이 형편없는 모양으로 자라났다. 여호와께서 그토록 기막힌 꼴이 되게 하셨다. 그의 모양은 아름답지도 않고 장엄한 것도 없었다. 도대체 우리가 부러워하고 매력을 느낄 만한 것이 그에게 하나도 없었다(현대어 성경 이사야 53:2).”
새싹 중에서도 마른 땅에서 돋아난 연한 순처럼 볼품없고 연약한 것은 없다.
“…….여호와의 권능과 승리가 그토록 비천하고 멸시받는 사람에게서 나타난다는 것을 도대체 믿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현대어 성경 이사야 53:1).”
진정한 영적 싸움은 져서 이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힘으로 눌러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무능함과 연약함과 죄악의 값을 대신 갚아주기 위해서 무참하게 짓밟혀주면서 이기는 이김이다. 사자처럼 무섭게 포효하며 달려들거나, 독사처럼 독을 품고 달려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순한 양이셨다. 때리면 맞고, 짓밟으면 짓밟히는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짓밟힘을 당하기로 작정하면 도무지 상대가 안된다. 짓밟힘을 당하기로 작정하면 이길 수 없다. 예수님은‘짓밟히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사셨다.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구세주가 사랑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짓밟힘을 당하셨다. 우리도 예수님 따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죽으러 오셨다 대신 죽으러 오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개정).”
예수님의 삶 속에서는 죄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악과 무능함 때문에 값을 대신 갚아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사형을 받으셨다.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대변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린도전서 9:19, 개정).”
사람을 얻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한 고난이 고난되지 않은 이유는, 영혼 구원을 위해서 고통당한 뒤에 찾아오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것 보다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 기쁨이 더 크면 대신 죽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침묵하셨다. 사랑의 값을 제대로 지불하시기 위해서 침묵하셨다. 허물 많고 죄 많은 다른 이들의 죄 값을 제대로 갚아 주시기 위해서 침묵하셨다. 침묵을 배우자. 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침묵하자. 나의 침묵으로 누군가의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침묵하자.
때로는 그 어떤 항변보다 황금같은 침묵이 큰 울림이 될 수 있다. 빛바랜 헌신이 되지 않기 위해서 황금같이 무거운 침묵을 견뎌낼 수 있는 저력을 기르자.
십자가는 엄청난 Paradox 역설이다. 강해져야 파워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져주고, 대신 갚아주고, 대신 죽을 때, 위대한 능력이 나온다. 단 한번만이라도 제대로 죽어보자.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