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시가 광장 한복판에 서있는 얀 후스동상
체코 공화국은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해체로 분리 독립되었고 국토의 면적은 한국의 4/5정도이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프랑스보다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공항 안내판에 한글이 함께 표기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대한항공이 체코공항 주식 절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얀 후스의 종교개혁과 그 유산
루터와 칼뱅보다 백년 전 보헤미아의 사제였던 얀 후스가 범접할 수 없는 절대 교황권에 대항하며 제대로 된 신앙을 부르짖다가 화형대의 잿더미로 사라졌다. 이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신학자들로부터는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지금의 체코 출신이었던 후스는 그저 안정적인 삶을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었지만, 막상 그의 눈에 비친 현실의 교회는 온갖 부조리의 장이었다.
기초학문인 철학은 신학이라는 절대 권력에 무릎 꿇은 시녀가 되었고, 교황은 돈을 받고 극악한 범죄에 면죄부를 내려주었다. 이때부터 후스는 강단에서, 설교단에서, 문서를 통해서 부패한 교회 현실을 비판하며, 오직 예수와 성서만을 근본으로 하는 초기 그리스도교로 돌아가자고 호소하였다.
후스의 동향민이었던 체코인들도 로마 교황청 중심의 신앙에서 탈피하기 위해 자국어로 설교하는 등 후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눈엣가시가 된 후스는 강제로 소환되어 굴욕적인 심문을 당하다가 결국 콘스탄츠 공의회 자리에서 화형에 처해지고 만다.
자기 주장을 철회하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는 추기경들의 회유에도 그는 “부디 나의 적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며 눈을 감았다.
종교개혁 역사에 있어 후스가 더욱 전무후무한 인물로 기억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체코라는, 당시 비주류 민족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보헤미안인 체코 출신의 후스는 프라하대학의 학장으로 지냈던 당시에도 자국민보다는 독일인 교수와 학생들의 세력이 더 컸던 것에 대해 늘 저항하고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라틴어로만 되어 있는 성서 교재를 버리고 체코어로 번역하여 다시 만들었고, 체코어로 설교하지 말라는 로마 교황청의 명령에 불복하며 의지를 이어 나갔다.
설교와 저술로써 초기 기독교 정신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체코의 지식인들과 왕실, 일부 귀족, 그리고 많은 대중은 열렬히 환호했다. 이렇듯 후스는 체코 민족에게 종교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라는 사회적 아이덴티티를 부여해 주는 역할을 해냈을 뿐만 아니라, 소외된 농민이나 하층 계급에게까지 자국 언어 및 눈높이에 맞춰 설교하는 등 소외된 자에게 사랑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즉 초기 기독교 정신을 여실히 실천하였다.
독일인의 멍에로부터 헤어 나올 수 있게 해준 그의 화형 이후, 체코인들은 ‘후스전쟁’을 일으켜 15년간 조직적인 전투를 곳곳에서 이어 나갔고, 그의 기독교정신을 이어받은 모라비아 형제단은 ‘체코 개신교’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모라비안(Moravian)은 누구인가?
윌 리엄 캐리가 인도에 가기 60년 전,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 가기 150년 전에 먼저 선교지로 들어갔던 사람들도 모라비안 교도들이었다. 그들은 1700대에 이미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20년 동안 파송했던 선교사 숫자가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지난 2백년간 모든 개신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수보다 더 많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모라비안들은 선교를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전유물이라고 생각했고 예수를 믿고 만나게 되면 선교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제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그 당시 종교개혁가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세계선교를 모든 교회에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사명은 주님의 제자들,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루터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장로교 기틀을 세운 칼빈 같은 경우는 브라질로 수십 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칼빈을 따랐던 많은 칼빈주의자들은 예정을 이미 하나님이 하셨으면 다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세계선교에 대해 미온적이었다.
후스를 따랐던 많은 개혁가들은 카톨릭의 핍박으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세계사에도 이름이 잘 알려진 ‘진젠돌프’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들을 만나서 함께 이룬 것이 모라비안 교회가 된 것이다.
모라비안들은 그린랜드에 1733년에 선교사를 파송 했지만 얼음으로 뒤덮인 곳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때로는 굶어 죽고 때로는 핍박을 받았다. 그렇게 죽어가면서 증거 했던 복음 때문에 에스키모인들이 마음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시작했다.
미국에도 수많은 모라비안 교도들이 미국 초창기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이 조지아, 펜실베이니아, 노스캐롤라이나 등이다. 많은 미국지역에 모라비안들이 들어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말씀을 전했다. 미국 초창기에 모라비안 선교사들의 흔적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복음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일생 동안 말을 타고 말 위에서 잠을 자면서 복음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 요한 웨슬리를 변화시킨 사람들이 바로 모라비안 교도들이었다.
다시 개혁이 필요한 교회를 향한 외침
프라하는 정말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해준다. 구 시청사 건물벽에 붙어 있는 유한한 인생을 깨닫게 해주는 시계와 동상 밑에 새겨진 진실의 7명제(진실만을 찾아라. 진실만을 들어라. 진실만을 배워라. 진실만을 사랑하라. 진실만을 말하라. 진실만을 지켜라.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실만을 사수하라)를 보면서 사람들은 열매에만 목을 매지만 뿌리와 줄기가 없는 열매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려준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은 얀 후스라는 줄기 위에 열린 열매였다.
올해 7월 6일이 얀 후스가 화형 당한지 602년이 되는 해이다. 그의 가르침인 종교적인 경건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구현될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 ‘사랑에 의해 형성 되는 믿음’ 이 다시 세워지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