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선교적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 대화에 깊이 참여해보면 결국 선교적 교회에 대한 어떤 모델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교회의 방향성과 추구하는 가치를 제시하는 것으로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선교적 교회에 대한 대화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실제적 적용이 어렵다. 딱히 따라 할만한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선교적 교회에 대한 책과 연구를 하면할수록 현재 얼마나 잘 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길이 명확하지 않다.
내가 이 칼럼을 통해 시도해보려는 것은 그 선교적 교회에 대한 이론들이 아니고 실제로 그 선교적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설립하고 어떻게 세워가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사실 독자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나 자신을 위한 시도라고 말하는 것이 더 솔직한 나의 속마음이다.
웰링턴에 내려와 선교적 공동체의 꿈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도 4개월이 지났다. 이제 교회는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어 간다. 지난주에는 설립예배도 드렸고 예배장소도 새롭게 빌리게 되어 좀더 안정적인 모습을 갖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정말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하는 내 마음속에 몇 가지 무거운 짐들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가지는 아직도 웰링턴에 있는 대학들에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그렇게 기대하고 내려왔던 직장인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처음에 연락되던 사람들조차 어디로 숨었는지 찾아보기 힘든 형편이 되었다.
정말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따라갈 모델도 없고 성공사례(?)도 흔치 않는 선교적 교회 공동체는 현재 제대로 세워져 가고 있는 것일까? 시작된 지 아직 4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내가 잘 가고 있는지 방향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은 그냥 무작정 정신없이 달려가야 하는 시기일까?
교회의 모습이 잘 갖추어져 가면 갈수록 내 속에 뭔가 중요한 한가지를 붙잡아야 한다는 이 불안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죠슈아 내일 저녁 미팅에 함께 참여해 줄래요?”
벌써 7-8년이 지난 이야기이다. 어느 날 오클랜드에서 목회를 한참 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에게 장소를 빌려준 키위 교회의 연세 많으신 키위 목사님이 밤늦게 전화를 했다.
“아, 네…… 시간은 되는데요. 도대체 무슨 미팅인가요?”
뜬금없이 자기들 미팅에 왜? 나를 오라 하는 건지 한편으로는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고 부담이 되기도 해서 미팅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흥미로운 주제로 특별한 모임을 만들고 나를 초대해 주었다.
요즘 많은 키위 교회들이 그렇듯이 젊은 사람들은 교회를 다 떠나가고 이제 노인들만 남아 버린 교회가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도대체 자신들이 무엇이 문제이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찾기 위해 나름 전문가를 불러 만든 모임이었다. 나도 그 이유가 궁금했던 차라 흔쾌히 모임에 참석했다.
모임의 전반부는 외부강사가 이끌었다. 위기에 처한 단체들(organizations)에 돌파구를 찾아주는 전문강사라고 했다. 딱히 교회 공동체를 전문으로 컨설팅해주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현재 하는 사역들과 모임들, 그리고 교회의 비전과 방향 등을 하나 하나 정리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이 스스로 문제점들을 찾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그 문제점들을 해결할 방안들도 스스로 찾아내게 하였다. 결론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찬양시간을 좀더 활성화하자는 것, 모임을 좀더 활성화하자는 것, 장애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신설하자는 것 등의 몇 가지 실제적 방안들로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모임의 후반부인 자유토론 시간이 더 흥미로웠다. 전문강사는 돌아가고 교회 직분자들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구체적으로 나누는 시간이었다. 한참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에 키위 목사님이 나에게 말할 기회를 주자고 제안했다.
지난 2-3년을 바로 옆에서 지켜 보면서 정말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이었다. 사실 그날 모임 내내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딱 한마디 있었다. 영어가 짧다 보니 이런저런 설명을 못하겠고 오히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그들에게 짧게 질문했다. “복음을 전해볼 생각은 없느냐?”라는 당돌한 질문이었다.
어떤 찬양을 부를 것인가? 어떤 악기를 사용할 것인가? 어디서 모일 것인가? 언제 모일 것인가? 또 어떤 봉사를 할 것인가? 그들이 저녁 내내 이야기 하던 내용들 모두 중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모임 내내 내 마음속에 의문으로 남던 한 가지는 복음이라는 단어였다. 이 교회는 복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꺼낸 복음이라는 단어, 그리고 전도라는 단어를 듣고 한 나이가 지긋한 남자분이 입을 여셨다.
“요즘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어요.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인정했습니다. 아니 최소한 죄책감 정도는 느끼며 집으로 돌아갔지요. 하지만 요즘은 달라 졌어요. 아무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니 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요즘은 전도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에요.”
내 짧은 영어로 조목 조목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냥 돌아오는 차에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도 복음이 답인데……’
선교적 공동체는 끌어당기는 교회가 아니고 보내는 교회이다. 선교적 공동체는 삶의 현장을 선교지로 여기고 선교사처럼 살아간다. 선교적 공동체는 예수님의 성육신 하신 모습으로 삶을 산다.
선교적 공동체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 아니 해야 할 말은 참 많다. 하지만 선교적 공동체에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한가지 뽑으라고 한다면 ‘복음’이다. 선교적 공동체는 복음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 공동체이다. 그래서 그 복음을 세상에 드러내고 그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역할을 한다.
지난 3-4개월동안 교회가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성도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교회가 제대로 가고 있는가를 고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음에 대한 확실한 DNA를 가진 교회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기 때문이다.
웰링턴은 정말 활발한 도시이다. 가끔 금요일 저녁에 시내에 나가 보면 정말 활기가 넘친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쿠바 스트리트을 금요일 저녁에 지나다니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곳곳에서 음악소리가 들리고 밤이 늦었는데도 생기가 넘치는 도시가 웰링턴이다. 여기저기 웃고 떠드는 소리와 음악소리는 들리지만 복음을 외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내 안에 이 답답함은 복음에 대한 갈증인지도 모른다. 복음을 듣지 못하는 갈증도 있지만 분명 외치지 못하는 갈증도 있다.
선교적 공동체의 이론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교회가 아니라 가장 복음으로 뜨거운 교회 공동체가 선교적 공동체일 것이다. 나는 또 멈추어 돌아 본다. 나는 복음으로 뜨거운가? 나는 복음으로 가득 찬 교회를 꿈꾸는가? 나는 복음이 해답임을 아직도 확신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