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장~37장을 보면, 욥에게서 의인의 모습을 찾아볼 길이 없다. 완전히 무너졌다.‘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3:1)이라고 하면서 자기 인생을 한탄하며,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다 드러냈다. 그런데 그 무엇이 욥을 의인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을까? 혹독한 고난 속에서 무엇이 달랐기에 성경은 욥을 의인이라고 하였을까?
욥은 하나님과 씨름했다
세 사람이 개와 달리기 시합을 했다. 사람들은 개보다 앞서 골인한 사람을 ‘개보다 더 한 사람’이라고 했고, 개와 같이 들어 온 사람을 ‘개 같은 사람’이라고 했고, 개보다 늦게 들어온 사람을 ‘개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예수님과 달리기 시합을 했다. 사람들은 예수님보다 앞서 들어온 사람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했고, 예수님과 같이 들어온 사람을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했고, 예수님 보다 늦게 들어온 사람을 ‘주님을 따르는 자’라고 했다.
인생은 누구와 씨름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진다. ‘개만도 못한 놈’으로 살 것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살 것인가’는 누구와 인생길을 걸어가느냐에 달려 있다.
욥은 누가 맞느니 그르니라는 문제로 치열하게 다투었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질문했다. 하나님께 하소연했고 하나님과 동행했다. 욥은 사람들과 씨름하는 것 같았으나 그의 근본은 항상 하나님께 질문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살았다.
욥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엎드렸다
38장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서, 지독하게 풀리지 않던 문제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끝난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문제가 없다. 그런데 수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긴 하는데, 조금 기도해 보고 포기하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만다. 안타깝다.
욥기 전체를 보면, 욥이 잘난 것 별로 없다. 친구들과 똑같이 말로 상처를 주고받고, 서로‘내가 잘났다, 내가 옳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런데 욥과 친구들 사이에 무엇이 달랐을까?
친구들은 자신들의 짧은 지식으로 욥을 가르치고 욥을 굴복시키려고 했지만, 욥은 문제가 심각해질수록 하나님께 하소연 했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다 쏟아냈다.
‘하나님 아픕니다. 힘듭니다.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시나요? 나를 버리셨나요?’ 등등.
현대어 성경 42:7-8절에 보면,‘…너희는 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으나 내 종 욥은 얼마나 솔직하게 말하더냐?’ 8절 ‘…너희는 내 종 욥처럼 나에 대하여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욥의 인생 속에 하나님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욥이 아무리 하소연하고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끈질기게 하나님께 하소연했다. 온갖 감정과 허물을 다 드러내고 추악한 속마음을 들추어낼지언정 그는 하나님을 찾았고, 솔직하게 다 쏟아냈다. 드디어 38장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여기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욥과 하나님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느냐?’는 대화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 자체이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니까, 꽉 막혀 있던 불가능한 문제들이 풀려버렸다.
하나님의 개입이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고 개입하시면 끝난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끝나지 않을 문제가 어디 있으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엎드려야 한다. 조금 기도해보고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마음을 좀 크게 가져라, 보는 눈을 좀 크게 가져라”는 말씀이었다.“하늘과 바다와 땅을 누가 창조했으며, 누가 그 범위를 결정했으며, 누가 운행하느냐? 누가 창조자냐, 누가 선악간의 진실을 더 잘 알고 있느냐, 저승문턱에 가 본 적이 있느냐, 어두움의 근원이 무엇인지 아느냐? 네가 알면 얼마나 아느냐? 조금 아는 것 가지고 옳다 그르다 억울하다 괴롭다 하지 말라.”
의역하자면, “욥, 억울해 하지 마라. 내가 다 안다, 너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나에게 맡겨라. 내가 해결한다.” 라는 말씀이었다. 그 말씀 앞에 욥은 마치 ‘으앙’하고 울음을 터트리듯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
하나님께서 친구들에게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고, 욥에게는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해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했다. 말씀대로 서로 용서하고 화해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욥의 이전 재산의 갑절을 주셨고, 딸 셋과 아들 일곱을 다시 주셨고, 140년을 더 살면서 손자들과 증손자들을 보며 천수를 다 누리고 살았다.
참으로 허무한 사실은 욥과 친구들이, 그렇게 죽일 것 같이 서로 다투며 싸웠던 내용들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해결해 버리시니까, 별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용서하고 화해했더니 죽느냐 사느냐 싸우던 문제가 안개와 같이 사라져 버렸다. 서로 잘못을 인정하고 화해하니까,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오해를 풀고 화해하고 났더니 서로 복을 누리며 함께 더불어 잘 살았다.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을 좀 더 넓게 키워야 한다
내가 아는 짧은 경험과 지식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전부인 양, 하나님의 뜻인 양 확신할 때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신비주의자는 신비주의자의 입장에서 욥을 책망했고, 전통주의자는 전통주의자의 입장에서 책망했고, 교리주의자는 교리주의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기준으로 고난 만난 욥을 책망했다.
권선징악, ‘선한 일을 한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한 자는 벌을 받는다.’는 생각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부분적 이치이다. 욥과 같은 경우 의인이어도 하나님의 다른 의도 때문에 고난을 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 만난 이들의 처지를 놓고, ‘이렇다 저렇다’쉽게 정죄하지 말고, ‘내가 당하는 고난, 하나님의 뜻이 숨어있을 수 있다.’ ‘저 사람이 당하고 있는 고난, 하나님의 뜻이 숨어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생각의 고착화를 피해야 한다.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은퇴한 김형석 교수가 작년에 97세의 나이에 ‘백 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냈다.‘백 년을 살아 보니, 내 인생의 황금기는 60-75세였다’는 고백이다. 그 한 마디의 경험담이 나이든 분들의 생각을 확 바꾸어 놓았다. 관점이 달라지면 인생이 달라진다.
‘인생은 60부터’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달라질 것들이 많아진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생각의 크기, 믿음의 크기를 좀 넓히자. 그리하여 어떤 얽히고설킨 인생의 실타래라도 재미있고 유익하게 풀어낼 수 있는 실력있는 인생을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