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동굴앞에서 본 밧모섬 전경
지난 5회에 걸쳐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에 대해서 살펴 보았는데 이들 교회의 유적들은 사도 요한 시대에 지어진 것은 아니다. 사도 요한 시대에는 결코 이런 큰 규모의 교회들이 생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사도 요한이 급박한 현실에서 요한계시록을 쓴 때가 성서학자들은 대개 AD 90-96년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시대 일 것이라고 하며, 이 때는 로마정부가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던 시기였다.
물론 그 당시 아시아에는 사도 바울 및 다른 사람들의 선교로 7대 교회 이외에도 여러 교회가 있었지만 무서운 박해를 피해 숨어서 지내는 형편이기에 가정교회 같은 공동체였지 거창한 건물들의 교회는 아니었다. 그리고 일곱 도시 중에 현재까지 존속되는 도시는 서머나(현재 Izmir)가 유일한 도시다.
지금의 교회 유적들은 로마의 기독교 공인 후(313경)비잔틴 제국 이후에 세워진 것이며 여기에 희랍, 로마, 로마기독교, 이슬람의 문명과 문화들이 복합적으로 융합된 흔적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창한 건축물들의 잔해가 아니라 그 모진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자라왔고 지금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사도 요한 시대의 원형 교회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름과 흔적이 남아 성서의 말씀을 확증해 주고, 또한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가다듬어 갈 수 있게 하는 것은 놀라운 복음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 시대의 7대 교회들이 처한 상황을 통해서 그 당시에도 말씀 하셨지만 오늘날도 똑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현재 우리의 신앙과 공동체가 어느 유형의 교회인가를 살펴 본다면 사도 요한 시대의 교회에 주신 말씀과 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7대 교회 유적들을 통해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세운 형식들(건물 및 제의적인 형식들)이 얼마나 쓸데없고 허무한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거창한 신전들의 유적과 교회 유적들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계시록의 탄생지 밧모섬
밧모섬은 그리스어로는 파트모스이다. 그 뜻은 ‘송진’이라는 뜻으로 터키 쿠사다시 항구에서 약100km 떨어진 에게 해의 작은 섬이다. 섬은 터키 본토와 가까이 있지만 그리스 영토이다. 이곳으로 가려면 터키의 쿠사다시에서 배로 약3시간30분 정도 소요된다.
섬 전체가 화산암으로 되어 있어 포도나 밀이 재배되고 있는데 문제는 물이 나지 않기 때문에 우기인 겨울에 물을 받아 두었다가 여름에 사용한다고 한다. 섬은 남북으로 약16km에 이르고 동서의 폭은 좁고 들쭉날쭉하며, 이 섬을 대표하는 스칼라 항구의 폭은 약1km도 안 되는 작은 섬이다.
요한 수도원에서 바라보면 나무꾼이 도끼로 찍어서 만든 모습처럼 불규칙한 해안선이다.
이 섬은 로마 제국 당시에 중범들의 유배 장소로 이곳에 끌려온 죄수들은 채석장에서 강제 노역을 해야 했다. 죄수들은 물이 없어 갈증으로 허덕여야 했으며 겨울이면 땔감이 없어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죄수들을 지키기 위해 이곳으로 오는 로마 병정들은 문제가 있었던 군인이었기에 그들의 말과 행동은 거칠었고 무자비하게 죄수들을 다스렸다.
성지 순례자들은 단지 사도 요한이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썼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이곳의 사정은 거의 모르고 지나간다.
이렇게 살기 힘든 곳에서 사도 요한은 터키 본토에 있는 성도들을 걱정하면서 계시록을 썼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요한이 계시를 받은 기념교회
이 섬에 성지 순례를 가면 꼭 방문하는 곳이 바로 사도 요한의 계시 동굴이다. 동굴 입구에는 사도 요한의 제자 푸로크로스의 성화가 있는데 그리스 정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자신이 받은 계시를 푸로크로스에게 구술했고 푸로크로스는 이를 기록하여 계시록으로 남겼다고 한다.
로마 제국의 도미티안 황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자기의 조카인 플라비아 도미틸라를 폰티아라는 섬으로 유배를 보냈으며 그녀의 남편 클라멘트를 사형시킬 정도로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다.
이때 사도 요한도 체포되어 다른 중 범죄자들과 함께 밧모섬으로 유배 되어 강제 노역을 하게 됐다. 이때 에베소에 있는 사도 요한의 제자들은 푸로크로스를 밧모섬에 보내어 사도 요한을 돕게 했다.
이 섬은 1088년 비잔틴 시대 황제 알렉시우스 콤메누스의 허가로 성 크리스토롤로스가 아르테미스 신전 터에 요한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터키의 니케아에서 태어나 부르사 근처와 유대 광야에서 은둔 생활을 한 후 밧모섬으로 왔다.
그리스 정교회에서 관리하고 있는 수도원의 종
그가 세운 요한 수도원은 비잔틴 제국의 원조를 받아 에게해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황제가 밧모섬을 크리스토롤로스에게 주면서 요한 수도원의 주교들이 밧모섬의 주인이 되었다.
16세기에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밧모섬은 자치 행정을 하다가 1832년 터키가 직접 통치하게 되었고, 1912년 1차 대전이 끝난 후에 이탈리아로 귀속되었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 파리 협정에 의하여 그리스의 영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