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아직도 마케도니아 환상을 기다리는가?

송재흥목사<오엠국제선교회>

선교사가 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은 역시 “하나님이 나를 선교사로 부르셨는가?” “나의 소명 의식은 분명한가?” 의 문제이다. 수많은 선교사, 강사들이 젊은이들을 도전하고 위협(?)하는 주제는 이 소명에 대한 확인 문제이다.

선교지에서 때로는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확신이 없고, 그러기에 아무런 열정 없이 사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왜 이분이 선교사로 왔는가?’ 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선교사들이 있다.

현장에서 25년 있으며 또 선교사를 훈련하는 사역을 해왔던 나에게 이 소명에 대한 확인은 그야말로 선교의 기초이자, 아니 그 선교사의 사역의 향방을 가늠하고 결정하는 바로미터라는 점이다.

이 부르심과 소명에 대한 확인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역으로 이 소명에 대한 성경적인 신학적인 오해로 말미암아 너무나 많은 헌신된 이들이 하릴없이 특별한 주님의 콜링(Calling)를 받기 위해 수많은 선교대회와 수련회를 전전하는 이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한 해에도 3-4곳의 선교대회에 강사로 가서 동일한 사람을 여러 곳에서 조우하는 경험이 많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1. 아직도 마케도니아의 환상을 기다리고 있는가?
많은 선교 헌신자들 가운데, 주님의 선교의 부르심을 사도행전 16:6-10절까지의 말씀에서 찾는 이들이 있다. 9절에 바울은 특별한 환상을 보게 된다. “그리고 바울을 청하여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는 음성을 듣게 된다. 그리고 바울은 이 환상 하나님께서 마게도냐로 가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인정한다.

이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선교역사는 방향이 바뀌어졌고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선교역사로 전환되는 터닝포인트(Turning Point)가 되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직접적인 주님의 부르심,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꿈을 통해서, 환상을 통해서, 선교대회나 부흥회에서 성령님의 직접적인 그리고 바울처럼‘어느 곳으로 어느 민족에게로 가라’는 직접적인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그리고 나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고 예수님을 향한 첫 사랑에 빠졌다. 그 후로 학교에서 ‘목사’라는 칭호를 친구로부터 들으며 전도에 힘쓰는 사람이 되었고 일생을 복음을 위해 살겠다는 헌신과 더불어 신학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대학 내내 제자훈련 사역을 하며, 한 사람의 비전(One Man Vision)과 월드비전(World Vision)을 이야기 하며 캠퍼스 전도에 헌신하였다. 수많은 선교사들의 간증과 선교에 대한 도전을 들어도 나에게는 놀라운 평강(?)이 있었다.

다른 이들을 하나님은 부르시지만 나에게는 단 한번도 사도행전 16장의 마게도냐의 환상처럼 나를 선교지로 부르시는 부르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학 내내 선교단체의 리더로 있으면서도 나는 평강(?)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나와 같은 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2. 마게도냐의 환상은 선교의 부르심이 아니라 인도하심에 대한 장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마게도냐의 환상은 선교사로의 부르심의 장이 아니라 인도하심에 대한 말씀이라는 점이다. 바울은 사도행전 9:15-18절에 바울 회심의 사건 당시에 바울이 아닌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통해 보여 주시고 사도행전 13:1-3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그는 파송을 받게 된다.

즉 바울은 이미 16장의 마게도냐의 환상을 보기 이전에 선교사로의 소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 중에 바울과 같은 이러한 극적인 부르심을 기대하고 있었다면 오늘부터 포기하기를 바란다.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선교의 소명은 선택이 아니고 명령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마음, 즉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없는 듯 하다. 예수님의 사역 당시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수 없이 모든 민족과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세계관과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신학교 내내 평강(?)을 누리며 살던 나를 선교사로 부르셨던 말씀은 이사야 6장도 아니고, 사도행전 16장과 같은 극적인 경험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수없이 외우고 설교했던 마태복음 28:18- 20절의 위대한 지상대위임 명령도 아니었다.

어느 날 마태복음 28:17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다. 즉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가 모든 족속으로 가라” 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확신에 차 있었던 상태가 아니라 17절의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라는 말씀처럼 의심과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나의 모습이자 또 수많은 헌신자들의 상태일 수 있을 것이다.

즉 선교의 소명은 나의 영적인 상태에서 나오는 위대한 결단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상태와 상관없이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와 그리고 명령에 순종하는 순종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나누고 설명할 때 수 많은 헌신된 젊은이들이 안도의 숨을 쉬며, 선교사로 결단하여 나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잘못된 특별한 경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4. 선교의 소명은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주의 제자들과 유대인들은 구약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마치 무당이 점을 치듯 하나님의 때(신원의 날)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요한복음 4:35절에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라고 말씀 하신다.

즉 지금이 추수의 때이고 아버지의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한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나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내 삶과 세상을 보는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오늘 당신이 아직도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다면, 다음의 질문을 먼저 하라.

“주님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인가?(요한복음14: 6). 주님이 나에게 이 복음을 증거하라 말씀 하시고 한 영혼을 향한 긍휼히 여기는 열정이 있는가? 그리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가?”

우리가 모든 족속으로 가서……(마태복음 28:18-20) 라고 말씀 하시는 주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다면, 당신은 나를 선교사로 부르셨는지 에 대한 수 많은 증거들을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