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하나 들고 노트하나 들고

청년들과 함께 있었던 작은 마이너 드왤링, 봄이 살랑살랑 지나가는 자리에 함께 앉아 이야기하는 것처럼, 노래하는 것처럼 글과 함께 흘러가보려 한다. 적어도 올해가 다 가기 전에는 청년들과 글로 이야기하고 싶다. 아래의 글은 운율을 하지 않은 산문이다. 쓰던 방식의 산문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읽으시던 독자께는 이해를 구한다.

그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 닮아 가는 것
육체가 고단하면 마음 돌볼 틈 없어도 하루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니‘그저 그렇게 사는가 보다’ 하겠지만 숨 쉬어 가겠다 하고 누우면 만가지 생각들이 떠오른다. 누운 듯 앉은 내 몸둥아리, 그저 받아주는 포근하고 작은 의자 위로 생각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금방 다시 고쳐 앉아서 짜증을 부리는 걸 보면, 육체는 편한데 마음은 번민함이 여실하구나 하고 그렇게 가만히 앉아 사색하는 사치가 밤을 당겨온다. 몸이 이 사치를 못 이겨갈 즈음 늦은 밤 드디어 잠을 청할 때, 긴긴 밤 부르던 그 이름을 한번 더 불러보고 눕는다.
‘주님, 예수님’

아침이 되었다. 새벽기도로 맞은 아침, 커피도 한 가득 내려놓고, 커피 드립퍼 필터 위로 피는 아로마로 작은 방 가득 채워놓고, 가만히 있다가 브라질 산토스 조금 식을 쯤 한 모금 들이키고, 펜 하나 들고, 노트 하나 들고 거실에 나와 앉아 함께 피어나는 생각을 꼼꼼히 적어간다. 답이라도 찾을 듯 글로 길을 만들어 간다.

든 것이 많으면 술술 적어 가겠지만, 머리에 든 것이 적어 천천히 꾹꾹 눌러 적고 있으면 어렸을 때 읽지 않은 소설이든 위인전이든 시집이든 다 가져다 읽고 싶지만 그렇다고 어느 세월에 저기 가고 있는 선비 같은 시인들 따라갈까 싶어 집어치우자 하고 그냥 내 속도에 맞춰 어슬렁 적어간다. 어설퍼도 웃지는 마시게들.. 뭐 그래도 어려서 나 나름 묵상한 말씀들이 가슴에 박혀있으니 그것 따라 사는 것 아닌가! 시인이 아니어도 되지. 그분 흉내만 내어도 되지 싶다.

흉내내기
예수님은 시인이셔서 우리를 위해 하늘에 글을 쓰셨고, 이 땅에서 삶을 사셨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보면 그분의 글은 이 땅의 글이 아니었고 그분의 시는 하늘에 쌓은 기도이며 바램이고 이루시고자 하는 소망이셨음을 안다. 그것도 무려 3년 6개월 지날 쯤 피로 쓴 시, 이는 사실 읽어 따라 가기에도, 찬찬히 생각하기에도, 감당하기 어렵다. 십자가 피로 쓴 시를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싶어 가만히 기도한다.

나도 그 길을 간다고 쉽게 이야기했던 시간들을 생각하고‘그 길’ 따라 왔는가, 다시금 돌아보면 가슴 먹먹해진다. 백일을 열 번 살며, 그렇게 세 번을 더하면 기도의 응답은 삶으로의 진언이 되어 간절한 움직임이 되고 그 삶은 큰 울림이 된다. 나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나는구나 싶다.

하늘에 쓰신 시를 이야기하실 때는 알아들을 수 있게 비유들을 들어 시대와 문화에 맞게 풀어 예로 들려주시는 친절함까지 가지셨으니 지금 읽어봐도 놀라울 뿐이다. 예수 사신 삶을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어서 닮고 싶어 어쩔 줄 모르겠으니 가만히 보고 또 생각해 마음에 깊이 새길 일이다.

가만히 돌아보면 십대 때부터 그분 흉내 내는 것에 맛들어서 그분 흉내 내는 사람들 따라 하기 시작하고 여태껏 그렇게 십 년 또 십 년을 살고 있지만 참 좋다 한다. 조금 더 진지해지면 그분 흉내 내는 것에서 닮아가는 것으로, 그분 닮아가는 것에서 다시 많은 부족함을 느끼며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제자가 된다.

지금은 그 시간들이 기억에 참 어설펐다 싶다네. 어설펐어도 그 시간이 있어서 돌아보는 인간으로 살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회심이 일어나니 푸념 섞인 후회가 아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회귀하는 거듭남이다. 거듭나서 온전히 살 수 있는 은총 안에 서게 되어서 결코 인간 후회들로 과거에 사는 것이 아닌, 회심으로 과거를 돌이켜 보고 주의 사랑에 뿌리내리고 새로운 시절을 따라 과실을 맺으며 마르지 않는 잎사귀를 가진 물 댄 동산, 포도나무 같은 삶이다.

다시 천천히 복음 읽기
그래서 펜 하나에 노트하나 들고 153번의 글을 생각의 강에서 건지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노력이 부질없어질 즈음의 일이다. 아무런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기적은 일어나는 것이다. 지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나로부터 오지 않고 물 댄 동산으로부터, 포도나무 줄기로부터 이르니 결코 하나님 나라에서 떨어져서는 이를 수 없는 미학이다. 다시 천천히 복음을 음미하고 그 언덕으로 가만히 따라 오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153가지의 지혜이다.

365일을 매일 걸을 수만 있다면 1000일이 닿을 즈음 흉내는 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조금 늦게라도 흉내 낸다면 안되겠는가! 그분의 삶을 닮거나 흉내라도 내어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제자의 삶을 살고 싶다. 삶을 잘 받아서 전달이라도 해주고 싶다. 모두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살라 하겠지만 실은 우리 개개인이 다 그렇게 살 수는 없고 같아지는 것도 불가능하니 우리는 우리 개인에게 맡기어 주신 길을 천천히 살아가야 한다. 제자가 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같은 길을 걷는 것이 감사하지만 다른 길을 걷는다고 욕할 것도 아니다. 아쉽기는 하겠지만, 조금 늦게라도 우리 주님 흉내 내며 걸으면 동무하고 함께 미소라도 건네길. 그렇게 함께 저기 하늘 꿈 바라고 사신 뜻을 따르고 살면 예수님의 제자 아닌가? 구원은 단번에 이루셨으니 믿음으로 얻은 행복, 영원한 말씀에 살리. 청년제자로 부르심은 날마다 생각하고 그 안에서 살 일이네. 우리 읽을 복음을 말씀에 쓰셨으니 써두신 그 글 길따라 천천히 따라가보자 할 일이라. 읽으며 그리며 가본다. 예수님의 역발상은 시대를 거스리고 또 시대와 함께 웃고 우시는 하나님 나라의 발상이었으니 우리는 살며 시인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복음을 시대에 녹여 푸른빛 소망의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런데 어려운 것 하나
그런데,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어려운 것이 있다. 우리가 늘 이야기하듯 믿음으로 얻은 은총이기 때문에 어려운 그 일. 3년 6개월 그것 하나만 생각하시고 함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도 나중에나 가서 겨우 이해했던 일. 성령이 오셔서 모든 것을 밝히 알게 하시는 것외에는 도무지 이해가 가능하지 않는 참 어려운 일. 바로 죽음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분명히 비교대상이 없는 그분의 완전히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으니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하면 도무지 이해할 이가 없다. 죽기 위해 사는 이들도 없다. 지금 죽으러 가자고 이야기한 디두모 도마가 용감하기 그지 없다. 부활을 알고 나서는 더욱이 거칠 것이 없이 인도로 그 길 따라 나서니 놀라울 뿐이다. 다 듣고 다 알게 되었다면 따라 제자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가만히 마음을 들여다보면 아는 것 같으나 모르고 보는 것 같으나 보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저 하늘만 바라는 나의 눈 꿈뻑일 뿐이네.

오 주여 우리 일어나서 저기 하늘의 소망따라 살게 하소서. 나의 3년 6개월이 다하는 즈음을 알게 하시고 그때에는 주님과 같이 부활을 꿈꾸며 내 누울 곳에 감사하며 눕게 하소서.

사흘 동안 무덤에 머무르셨으나 죽음의 권세를 깨시고 더욱 강한 소리를 발하시는 주님과 함께 설 것을 꿈꾸며 믿게 하소서. 죽음에서 일어나 보이신 이들에게 말씀하신 음성 가슴으로 듣게 하소서. 모여 오순절이 이르도록 합심하여 기도하도록 부르신 사랑하는 주님, 나도 부르시고 우리 젊은이 교회들을 부르셔서 이곳에서 먼 데에 이르기까지 가라 말씀 하시옵소서. 지금 내 귀에도 외쳐 주시옵소서. 일어나 가리다!

그리고 사랑하는 주님 예수여, 오시옵소서. 곧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