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발에나 맞는 신발은 없다’는 말이 있다. 신발을 신은 사람만이 발이 불편한지를 안다. 그래서 신발만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신발을 신어 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한다. 때로는 신발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불평하는 중에 발 없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사람의 신발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이고, 느껴지고, 인상이 남는다. 신발 신는 습관을 통해 그 사람의 성질, 성격, 성품까지 보게 된다. 교육과 경험 그리고 생활수준까지 알게 된다. 그러나 선입관에도 틈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거나 완벽하지 못하다. 누구에게나 맞는 신발이 없듯이 사람에게는 신는 신발크기가 다 다르다.
부부가 한 몸이라고 해도 남편은 아내의 신발을 신지 못한다. 아내도 남편의 신발을 신으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이도 엄마의 신발을 신지 않는다. 이처럼 사람은 원초적이고 근본적으로 함께 있어도 더불어 있어도 외로운 존재이고 고독하다.
신발에는 대부분 끈이 있다. 아무리 좋은 신발이라도 끈이 없으면 못 신는다. 신고가도 불편해서 오래 못 신고 멀리 못 간다. 신발에 끈이 반드시 있어야 하듯이 사람에게도 끈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에게도 이어주는 관계가 있어야 한다.
‘오이밭에서는 신발끈을 묶지 말고 배나무 아래서는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신발에 꼭 필요한 끈도 분명하게 단단히 맬 때가 있고 느슨하게 풀 때가 있다. 신발끈을 맬 때와 풀 때를 제대로 모르면 불편을 주고 신발끈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게 된다. 사람과의 관계도 서로 맬 때와 풀 때가 있어야 한다. 자기 정체성을 올바로 깨닫는 일의 중요성을 신발과 끈과의 관계를 통해 알게 된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기대와 요구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 오실 메시아의 신발끈도 매거나 풀기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자기 분수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기대감을 주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행동한다.
꼴로 신을 삼겠다’는 말처럼 은혜를 잊지 않고 갚으려는 마음이 있다. 짚신도 제 짝이 있듯이 교만으로 거짓말 하는 사람과 은혜를 알고 행동하는 사람은 다르다. 모두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기를 싫어하는 시대에 세례 요한의 삶이 주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귀와 눈과 마음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내 영혼의 신발상태를 제대로 살펴보고 욕구, 욕망, 욕심의 길로 가려는 길에서 돌이켜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으로 거듭나 진정한 기독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복음의 민들레 홀씨가 되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생명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승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