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 완전하게 해석된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다른 요한복음만의 십자가 이해를 가지고 있다. 요한이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최고의 계시이다. 무엇보다 요한이 이해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완전하게 해석된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이라 할 수 있다. 공관복음에는 각각의 수난 예고가 있지만, 요한복음은 어떤 명시적인 수난예고가 아니라 12장 이후 십자가를 지시기 일주일 전의 기록으로 예수의 모든 말씀과 행함은 잠시 후에 있을 십자가를 향해 있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식탁에서 함께 긴 고별사를 하시고, 대제사장으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며 십자가 수난을 준비한다.

요한의 관점에서 예수의 생애와 죽음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해되며, 십자가 죽음을 예수 생애의 정점으로 이해한다. 특히, 예수의 십자가를 고난과 죽음으로만 정의하지 않고 역설적으로 예수께서 높아지시는 승리와 영광의 자리라고 선포한다. 즉 예수께서 죽은 후 부활하셔서 높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미 최고로 높임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셨음을 의미한다.

요한은 인자의 들어 올려짐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를 강조하고 있으며, 특별히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의 정체성을 계시하고 있다. 예수는 자신이 출애굽 시대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들려야 할 것을 말씀(3:14; 8:28; 12:34)하심으로, 이사야서에서 야훼의 고난받는 종이 형통하여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는 약속(사 52:13)을 성취하게 될 것을 반복적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십자가에 높이 들어 올려져 죽음으로써 그를 바라보는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높여진(exalted) 그리스도와 부활한 그리스도가 구별되지 않는다. 예수는 부활하기 전에 먼저 십자가에서 이미 높여지셨다.

무엇보다 요한의 십자가 이해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예수의 십자가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보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를 의지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장소이다. 예수는 자신을 엄습하는 십자가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자리에서도 아버지가 함께 계심을 확신하시며,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고난의 잔을 아버지의 뜻에 의지해 기꺼이 받으신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아들의 십자가는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모든 뜻을 이루게 하셨다. 예수는 성령을 힘입어 아버지를 의지하고 순종하셨고, 그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무엇보다 아들의 십자가는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최고로 보여주는 계시의 장소가 되었으며,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본질인 영광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완전할 수 있는 이유는 십자가를 지신 분이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은 곧 약속된 구원이 이미 성취된 것이며 현재의 삶에서 경험되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자리이며, 우리의 구원의 기초를 놓고 그것을 완성하는 사건이 되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십자가
바울은 에베소서를 쓰면서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가지셨던 계획을 찬양하면서 시작한다. 하나님은 땅의 기초를 놓기 오래전부터 우리를 마음에 두시고 그분의 사랑으로 온전하고 거룩하게 되도록 하셨다. 아주 오래전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녀로 맞아들이기로 작정하셨다(엡 1:4~5). 바울이 고백한 찬양의 핵심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랑으로 구원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선포는 당시 교회의 신앙고백이었을 것이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당혹스러운 주제였다. 왜냐하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당시 대적자들은 유대종교에서는 신성모독으로, 정치적으로는 로마에 의한 평화를 깨뜨리는 반란 죄목을 내세운 가장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약의 저자들은 그러한 십자가를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 누가는 예수가 사회적 잔인성에 의한 무죄한 희생자로 죽임을 당했다고 말한다(눅 23:47).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요 지혜라고 불렀으며(고전 1:23~24), 유대교의 희생제사에서 차용하여 화목제물(Propitiation)로 부르기도 하였다(롬 3:25). 히브리서는 더 나아가 예수를 대제사장인 동시에 대제사장이 드리는 희생제물이 되어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고 단언한다(히 9:11~12). 요한도 예수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보내신 화목제물로 이해한다(요일 4:10).

요한이 전한 복음은 이러한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계획을 하나님과 함께 계신 로고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예수에게 힘을 주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여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4:34). 예수가 말하는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며(6:38~40), 이를 위해 아들의 선재에 대해 이야기한다(8:58; 17:5, 24). 선한 목자인 예수는 아들을 보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10:11, 15, 17, 18).

예수는 아버지의 구원계획과 뜻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취하시고,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다(10:28). 또한 아버지의 뜻인 영생은 아버지의 계명과 직결된다. 예수는 아버지의 명령이 영생이라고 말씀하시며(12:50),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신다(15:10).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주셨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위임해 주셨다 (17:2).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아들 예수를 앎으로 영생을 맛볼 수 있다 (17:3).

요한은 예수의 죽음을 의식적인 행동, 즉 아버지에 의해 죽임당하기로 운명지워져 있으며, 아버지께 자원 제물로 드리기로 되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받아들이신 것으로 이해했다. 요한이 보여주듯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그의 기독론적 이해의 절정이며, 자신의 지상 사역을 마무리하고 아버지께로 가고 있는 아들의 숨겨진 승리이다. 이것은 아버지에 의해 버림받은 아들을 그리는 공관복음과 대척점이며, ‘나를 보내신 아버지는 나를 홀로 남겨두지 않으시며 나는 언제나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고 말하는 요한복음의 확언이다(8:29; 16:32).

이것은 우리의 죽음의 비밀에 대해서도 무엇인가를 계시해 주는 것이다. 요한의 수난사화는 죽음의 장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기독론적 이해에서 바로 구원론적 이해로 데려간다. 죽임당한 예수의 열린 쪽으로부터 생명과 구원의 물줄기가 흐른다. 19장 30절의 마지막 말씀은 요한신학에서 중요한 하나의 주제를 제시한다. 마태와 누가도 예수의 죽음을 ‘영혼이 떠나셨다’고 표현하지만,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영(성령)을 십자가 밑에 있는 사람들, 특히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한 가족으로 여기며 성령 안에서 새로운 가족이 탄생됨을 말씀하신다. 이어서 요한은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이 바로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결정적인 순간이며 성령을 주시겠다는 상징적 언급에 대한 기대를 불러오는 시점이다.

‘다 이루었다’
예수의 외침인 ‘다 이루었다(요 19:30)’는 무슨 말인가?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인가? ‘이루다’ 의 사전적 의미는 끝내다, 완성하다, 실행하다, 지불하다이지만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의 뜻을 온전하게 전달하는 것을 함축한다. 이는 종교적인 행동들을 수행하고 그 의무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하신 ‘다 이루었다’는 말은 그가 고난과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수행했으며, 믿는 이들에게 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을 보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준 일에 대한 완성형 표현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 계획, 약속, 이름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 등이 아들 예수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 모두 이루어진 것이다.

마태와 마가의 가상칠언은 시편 22편의 첫 구절을 인용함으로 야훼의 뜻하신 바대로 세상의 모든 끝이 야훼께로 돌아올 것을 기대한다. 누가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로 대체하였다. 우리는 무엇이 정말 예수의 마지막 말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떤 면에서 요한복음의 ‘다 이루었다’는 4복음서의 가상칠언 전체를 결론짖는 말이다.

‘다 이루었다’는 13장 1절의 ‘끝까지’와 19장 28절의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을 아시고’와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요한은 예수께서 지상의 모든 사역이 마쳤다는 것을 아셨다고 증언함으로 마태와 마가에서 아버지에게 버려진 듯한 예수의 말씀을 대체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묘사는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에 있다. 즉 요한은 예수가 아버지의 명령을 끝까지 순종하고 완수하여 그의 지상 사역을 마치는 스스로의 죽음으로 이해하였다.

요한의 관점으로 보면 지금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마치고 땅에 들려서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이끌고 계신 것이다(요 12:32). 예수의 외침은 승리의 외침이며, 그 승리는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 죽음으로 순종하신 승리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번째 천사가 진노의 대접을 쏟아부을 때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들려온 ‘되었다’라는 말씀에서 반향을 일으킨다. 하나님의 뜻과 명령하신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계 16:17).

이러한 하나님의 뜻, 계획, 목적은 하나님이 창조 때부터 가지셨던 계획이며, 아담의 시대부터 다양한 형태의 언약을 통해 계시되어 왔다. 예수는 이것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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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봉조
총신대 신대원 졸업. 세계선교교회 담임. “언어는 존재의 힘이다”는 통찰을 빌려 신학을 기반으로 한 인문학의 언어로 하나님과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통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삶의 귀중한 자리를 확인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