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떻게 살래?

오늘이란 ‘하루’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늘 맞이하는 식상한 날인가? 아니면 가치 있는 특별한 날인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고통 중에 살아야만 했던 죄수들의 ‘하루’는 과연 어떤 삶이었을까?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1945년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8년 동안 강제노동 수용소 생활을 했다. 그는 이 경험을 근거로 수용소에서의 ‘하루’를 관찰하며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저, 민음사, 2004) 라는 소설을 썼다. 이 작품으로 그는 197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문제가 있으면 해법을 찾아라
솔제니친 작가는 소설을 통해 소련의 정치권력의 허상과 모순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동시에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약자들의 실상을 묘사하며 이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작품 속에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슈호프는 혹독한 강제노동수용소에 배치되었고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들과 씨름해야만 했다. 이 소설은 그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해법을 소설 속의 문장으로 보여준다.

_“따뜻하게 있다가 온 놈이 한(추운)데서 떨다 온 사람의 심정을 알 리가 만무하다”
강제노동 수용소의 삶은 딴 세상이다.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세상을 알 수 없다. 수용소의 삶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막사에서 나와 강제노동을 할 때면 혹한이 온몸을 움츠리게 했다. 기온은 영하 이십칠 도였고, 슈호프는 몸의 열이 삼십 칠점 이도였지만 몸을 녹일 유일한 방법이라면 죽어라고 곡괭이질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용소 생활에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아침 식사 시간 십 분, 점심과 저녁 시간 오 분이 수용소 사람들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다. 이들 중에 강한 놈은 살아남았고, 약한 놈은 죽어 나갔다.


슈호프가 주변 동료들에게 강제노동수용소라는 밀림 속에서 살아남는 자에 대해 말한다. 수용소 안에서 자기만 살려고 남의 것을 탐내든지, 꾀병으로 의무실에 갈 궁리만 한다든지, 정보부원들을 찾아 고자질을 한다든지 하던 사람들은 의외로 죽어갔다. 그렇지만 강제노동수용소라는 삶의 결핍과 고통의 환경에서도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길은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자기만이 아니라 ‘함께 라는 동료의식’이 생존의 해법이 된다는 것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라는 로마서(12:15)의 말씀처럼 말이다.

_“인간의 운명을 이렇게 쉽게 바꿔 놓다니, 이렇게…….”
한 인간의 삶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국가권력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렸다. 상식과 법이 통하지 않았다. 죄수가 강제노동수용소의 관리자들에게 미움을 받으면 영창으로 보내졌다.


“열흘! 이곳 중영창에서 열흘을 살고 나면, 이미 그의 건강은 평생을 두고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다. 십중팔구는 결핵에 걸려 다시는 병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만약 중영창을 십오 일 살게 되면, 이미 그 기한이 끝나기도 전에 축축한 땅에 묻히고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막사 안에서라도 지낼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영창 신세를 지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죄수들은 하나의 노동기계였다. 슈호프와 그의 동료 죄수들은, 끝도 없이 수많은 세월 동안 모든 사고조차 마비되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조차 잃어버리고, 그러한 상황에 익숙해져 살아가는 희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런 비참한 현실을 직면해야만 할 때 과연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소설에서 두 명의 죄수들이 나눈 대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도움을 준다.


“예술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어떻게 라는 것이 우리에게 선한 감정을 고양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면 그게 다 무슨 쓸모가 있단 말입니까!”


이 말은 작가가 비록 수용소의 삶이 비참할지라도 마치 예술처럼 ‘선한 감정’(행복한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좋은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한다. 성경도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지 않는가?

_“하느님이 헌 달을 별로 만드신다는 거야.”
소설 속에 표현된 이 말은 신이 슈호프의 수용소 삶을 힘들게 하셔서 마침내 빛나는 별과 같은 자로 만드신다는 뜻이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주인공 슈호프는 수용소에서의 삶이 비록 힘들지만 역설적으로 행복하다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마치 고난을 다 통과한 욥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를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던가. 그리고 찌쁘듯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위의 주인공 슈호프의 하루에 대한 평가를 읽으며 이어령의 말이 생각났다. “감사하는 행위, 그것은 벽에다 던지는 공처럼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이어령의 말』 이어령 저, 세계사, 2025). 또한 전도서에 있는 말씀도 이와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3:12-13)

우리는 감사와 행복의 표현을 자주 해야 한다. 우리는 내일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오늘 하루를 잘 사는 것이다. 잘 산다는 의미는 오늘을 후회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나의 미래가 될 것이다. 주인공 슈호프는 하루를 보내며 작은 것 하나에도 귀하게 여기며 살았다. 강제노동으로 힘든 세월을 지나며, 강추위로 인해 살을 에는 그런 고통 속에서도 하루를 만족하며 사는 그의 태도에 감동을 받는다.

작가가 당신에게 묻는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슈호프가 수용소에서 ‘하루’를 어떻게 견뎌내고 승리했는지를 살펴봤다면, 작가는 이제 독자인 당신에게 묻는다.

“너는 어떻게 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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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겸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목회트렌드 2024』및『다음세대 셧다운』공저. 오클랜드감리교회 담임목사. 하나님이 사람과 소통하시려고 성육신 하신 것처럼, 기독교인도 세상과 소통할 통로가 필요하기에 인문학을 통해 세상과 만나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