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내가 새거루 만들어 듀께. 걱뎡마.”
두 살쯤 되었을 때였던가? 그림 그리기를 하던 따님께서 입고 있던 티셔츠를 도화지 삼아 화려한 그림을 그리셨다. 절망하는 내 모습에 자신 있게 내뱉은 말이, 새 걸로 만들어 줄 테니 걱정 마시라. 그리고 이어진 정체 모를 주문들과 귀여운 갸우뚱… 마법 주문에 실패한 딸의 우울함은 바나나 우유로 달래 주었으나 빨아도 얼룩이 남아 우스꽝스러워진 티셔츠는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세월이 지나 뽀로로의 세계관에서 졸업한 우리 따님은 빨래와 세탁에 대한 범인으로서의 고충을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고, 가끔씩 뭔가를 옷에 묻히기라도 하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는, 지극히 정상적 조건반사를 지닌 평범한 아이로 잘 성장하였다. 모두가 나의 꾸지람과 잔소리 덕분이리라… 오늘도 이렇게 나의 잔소리로 딸과 남편을 잘 양육하고 있으니 참으로 뿌듯하도다.
동감하시겠지만 누군가의 습관을 바꾼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한두 번 부드럽게 얘기해서는 잘 들어먹지를 않는다. 잘 씻어라, 양치해라, 옷 잘 걸어 놔라, 쓰고 난 물건 제자리에 갖다 놔라, 등등등… 이미 익숙해진 습관을 바꾸기 위해 누군가는 수고로이 당근과 채찍을 손에 들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오늘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 한가지 새로운 습관을 들여 보시 길 종용하려 한다.
언제부터인가 PAK’nSAVE, Woolworths 등 대형 슈퍼마켓들이 물건 담는 비닐봉지를 종이봉투로 전면 교체하였다. 쫀쫀하고 질겼던 비닐봉지는 무겁고 축축한 야채들을 담기에 편리했으며, 물건을 집으로 가져와 소기의 목적을 마친 녀석들은 쓰레기봉투로 재활용하기 안성맞춤이었기에 이런 비닐봉지를 쫓아낸 종이봉투가 왠지 주는 거 없이 미웠다. 게다가 종이봉투는 부피는 커서 허우대만 멀쩡한 녀석이 쉽게 젖고 잘 찢어져서 두 번은 써먹지 못할 물건이라는 게 첫인상이었다. 모르긴 해도 슈퍼마켓 측에서도 더 비싼 값을 지불하고 종이봉투를 비치해 놓아야 했으리라.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런 달갑지 않은 봉투를 감내해야만 하는 것인가? 아마 많은 분이 답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는데, 이는 환경 보호를 위해서다. 우리들이 쓰고 버리는 제품들, 플라스틱 제품들의 환경에 미치는 위해성이 도를 넘어선 지 오래되었다. 생활의 편의를 위해 대량으로 제작되어 쓰고 버려지는 많은 플라스틱 제품들이 올바로 폐기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토양으로, 해양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가 사는 집, 입는 옷, 자동차와 가전제품, 집기와 음식 포장에 이르기까지 플라스틱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충만해 있다. 그리고 무심결에 이런 제품들을 사고 버리는 데 우리는 익숙해져 있다.
202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보고에 따르면 전 세계 연간 플라스틱 생산은 최근 70년 동안 약 306배 증가하여 2019년 한 해에만 4억 6천만 톤이었다고 한다. 플라스틱의 재활용률은 고작 9%에 불과하며, 91%가 사용 후 버려지는데, 2019년 기준, 플라스틱 쓰레기 610만 톤이 수생환경에 침투했고, 이 중 170만 톤은 바다로 들어갔으며, 이러한 경로로 바다에는 이미 약 3000만 톤의 플라스틱 폐기물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플라스틱 쓰레기의 위험성은 생분해가 어렵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연상태에서는 500년 정도 걸려야 분해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썩지 않고 부서져 만들어진 1㎛(마이크로미터, 100만분의 1∼5㎜) 크기의 미세 플라스틱들이 생태계의 전 먹이사슬에 분포되어 우리가 먹는 식품과 음료에서도 검출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지구 전체가 얼룩진 티셔츠처럼 플라스틱으로 오염된 상태인 것이다. 체내에 흡수되는 작은 플라스틱 알갱이들이 혈관과 장기에 쌓여 우리는 알 수 없는 원인의 질병으로 고통받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각종 암이 증가하고 아토피와 난임 환자가 늘어난 것이 이러한 환경오염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 아닐까 나는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뉴질랜드 정부는 플라스틱 봉지의 사용 금지에 이어 일회용 빨대나 접시 및 식기류 일부에도 플라스틱 제품을 금지하고 나섰다. 그 덕분에 우리의 일상은 좀 더 불편해졌고, 아마 써야 할 돈도 더 늘었으리라.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희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훨씬 큰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가야 한다는 점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청지기 정신에 익숙하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자원들, 즉 재물과 물질과 사람 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으로, 우리는 이것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고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 환경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누리는 아름다운 뉴질랜드의 바닷가와 깨끗한 공기, 맑은 하늘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분명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소중한 유업인 것이다. 하나님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라(시 24:1)고 말씀하고 계신다.
설명이 너무 길어져 버렸다. 여러분께 종용하고 싶은 습관의 정체는 바로 환경을 의식한 구매와 소비이다. 어찌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지금부터 시도하려고 노력해 보시면 호락호락하지 않은 과제임을 깨닫게 되실 것이다. 가급적이면 환경에 영향이 적은 친환경 제품들을 구입하고, 플라스틱 쓰레기가 덜 나오는 방법으로 소비하는 것.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맡겨 주신 자연을 지키고자 하는 작은 습관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수제 비누를 만들고, 판매하는 과정에서 나는 최대한 천연 재료들을 사용하고, 화학물이나 플라스틱 제품의 사용을 지양하고 있다. 특히 포장지나 봉투 같은 것들은 단가가 비싸더라도 자연에서 분해되는 재료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내 위치에서 행할 수 있는 환경 보호를 위한 작은 실천이다.
플라스틱으로 오염된 세상과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아담의 죄로 인하여 후손들에게 원죄가 이어지고, 자연도 오염되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척박한 환경이 된 창세기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리고 우리를 그 죄의 사슬에서 끊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생각이 난다.
이제 곧 부활절이 다가온다. 내게 그저 막연하기만 하던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충격적으로 명확히 보여준 영화, ‘The Passion of Christ’ 중에 내게 감동적인 장면이 있다.
예수께서 피투성이인 채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르는 중에 육체의 한계에 부딪혀 쓰러지신다. 멀리서부터 예수님을 뒤쫓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달려가자 안쓰러워하는 어머니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See, mother, I make all things new.’ 이 대화는 실제로 성경에는 없으나 영화의 감동을 위해 만들어낸 허구일 것이다. 어쨌든 인간적으로는 피하고 싶었던 고난의 길이었지만 죄로 인해 막혀진 하나님과 사람들의 담을 허무시기 위해, 그래서 세상과 인류를 죄의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새롭게 만드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명과 의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며, 또 앞으로 재림하셔서 플라스틱 뿐만 아니라 탐욕과 무지로 오염된 세상과 인류를 창조의 모습대로 회복시키실 그분의 역사를 기대한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계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