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장애인 주간에 교회들이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장애인의 어려움을 직접 체험하는 활동을 진행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장애인의 도구를 가지고 장난을 합니다. 휠체어를 타고 목발로 칼싸움을 하고 일부 어른들은 장애인의 도구를 함부로 대하는 아이들을 나무랍니다. 그리고 이어서 시각장애인의 불편함이나 청각장애인의 불편함을 그리고 지체장애인이 겪는 어려움을 겪어보라고 구체적인 현장 체험의 기회를 참여하게 합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팔과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세상을 겪어보는 장애 체험이란 걸 처음 보았을 때 저의 솔직한 느낌은 뭔가 불편했습니다. 속으로 떠오르는 “뭐야 저거. 저 불편한 걸 왜 굳이 체험해”라고 하는 말을 입 밖으로 뱉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장애를 불편함과 불구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시선은 결국 동정 그 이상은 아닐 것입니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가족 그리고 장애인과 함께 일하는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은 얄팍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행동은 안 된다고 말하지만 정작 장애인을 인식할 때는 특별한 보여주기 수준에 그치게 되곤 합니다. 장애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우리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의 뜻을 이해한다면 “우리도 장애가 얼마나 불편한지 몸으로 겪어봅시다” 대신에 “우리가 보여주는 불편한 시선과 배려 없는 말 한마디가 장애인에게 얼마나 무섭고 힘겨운 폭력이 되는지 인식합니다” 하고 편견을 하나씩 걷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혹시나 교회에서 장애인 주간 행사를 준비한다면장애를 체험하는 이벤트가, 장애의 불편함을 체험하는 이벤트에서 장애인에 대한 손가락질하는 세상의 편견을 바른 시각으로 표현하는 생각을 바꾸는 이벤트로 조금씩 바뀌어 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편견을 가진 사람들의 말들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종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율법에 포장된 그럴싸한 정죄와 편견의 폭력성을 사랑과 인자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소외되고 낙인찍히고 용납받지 못한 존재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고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동네로 내려보내셨습니다.
4월 20일은 한국에서는 장애인의 날이며 교회력에서는 장애인 주간으로 지킵니다. 장애인을 포함하는 교회를 표현하는 가장 아름다움 표현은 “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린도전서 12:27)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부유한 고린도 교회에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교회가 장애인을 비롯하여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린도전서 12:20-25)”
교회가 부유해질수록 교회 안의 구성원들을 그들의 생산성에 따라 차별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린도는 부유했지만 생각해 보면 오늘날의 교회는 아무리 작아도 그 고린도 교회보다 더 부유합니다. 그런 부유한 오늘의 교회에게 교회 안에 있는 더 약하고 덜 아름다운 지체에게 더 귀한 것을 입혀주고, 더 아름다운 것을 얻게 하는 것이 몸인 교회와 그 사회를 고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할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사회가 건강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건강한 몸의 구성원인 각 지체와 개인들이 튼튼하게 됩니다. 우리는 내게 남은 것을 나눠주는 동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같은 지체임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밀알 토요 모임은 발달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비장애인이 걷는 걸음보다 조금 느리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예수 안에서 각자의 걸음을 각자의 발걸음으로 조금씩 성장하며 자라가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지체된 공동체입니다.
몇 주 전부터 글랜필드 커뮤니티 처치에서 지원해 준 핸드벨로 음악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핸드벨의 특성상 한 사람이 음에 해당되는 핸드벨 하나를 들고, 박자와 리듬을 서로 맞추어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 고도의 협력이 필요한 협동 악기입니다. 장애인의 수준에 맞추어 소고나 북의 단순한 두드림 악기가 아니라 각각이 자기의 몫을 맡아서 제때 소리를 내야 하는 핸드벨은 큰 도전일 수밖에 없고, 어쩌면 연주가 불가능한 그저 소리나는 시끄러운 장난감 놀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핸드벨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핸드벨의 작지만 청아하게 아름다운 소리를 내었습니다. 평소에 여러 이유로 구석구석 흩어져 있던 밀알의 식구들이 다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특히 작은 아이들은 멀리서 이 소리를 듣고 호기심에 달려와서 핸드벨을 들고 마구 흔들었습니다. 이쯤되면 작은 교실이 아주 소란스러웠을 것 같겠지만, 각자 모두가 흔드는 작은 핸드벨 소리가 각각의 음역을 채우면서 맑은 물소리처럼 시원하게, 때론 시원하게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은방울 소리처럼 부드럽게 신비로운 소리들로 방안을 채워져 갔습니다.
그리고 조이풀 오케스트라 단원 중에 봉사하는 학생이 지휘하고, 학생봉사단, 선생님들과 봉사자들이 회원들과 팀을 이루어 각각 화음별로 나눠 앉아서 핸드벨을 흔드니 멋진 하모니를 이루는 연주가 되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음악을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으로 연주하니 천사의 찬송이 부럽지 않으며, 밀알 식구들과 봉사자 모두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누렸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몸이요 우리는 지체입니다. 핸드벨은 똑같은 소리가 아니라 각각 다른 소리를 냅니다. 만일 다 같은 소리를 내는 같은 음만 있었다면 단조로운 공명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각각 소리가 다르기에 다른 소리들이 모여 하모니를 이루니 아름다운 연주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밀알 공동체 안에 각각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지휘를 따라 자기 목소리를 내지만 전체적으로 하모니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 됨을 다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생각 중에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애정으로 돕고자 하지만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같이 만들려는 시도는 장애인과 가르치는 사람 모두 힘들게 합니다. 오히려 장애인 각자가 자기의 호흡으로 숨을 쉬고, 각자의 소리와 각자의 걸음의 속도로 자신을 선택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장애인 자신과 또 장애인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방법입니다. 사람은 모두가 다릅니다. 장애인도 그 다름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요즘은 밀알 토요 모임에 오면 진행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진행하면서 “우리 함께 걸어요” 라는 구호로 진행했습니다. 이 구호는 동정의 시각이 아니라 장애인을 배려하면서, 같은 길을 각자의 걸음으로 각자의 보폭으로 걷되 같은 공간에서 같은 풍경에서 공동의 경험을 나누기 원했습니다. 이는 성찬식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성찬식의 한 떡에서 각자의 몫을 떼어 각자의 행복을 먹듯이, 같은 공간을 걸으면서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각자의 추억의 몫을 가져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