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는 말씀의 거울 앞에 나를 비춰보는 시간이다. 거울이 발명되지 않았을 때 살던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로 와서 난생처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성경은 우리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날마다 내 영혼을 비추어 보는 사람은 세상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 가능성이 많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평가와 말씀의 기준으로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제대로 된 신앙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
간음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
“1.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장 1~11)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요 7:53)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다. 사람들은 쉴 곳이 있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지만 예수님은 머리 누일 곳도 없었기에 산으로 가셨다. 감람산에서 쉬기도 하고 기도도 하셨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감람산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셨던 큐티 장소였다. 나의 감람산은 어디인가? 나의 큐티 장소,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그곳이 우리의 감람산이 아닐까?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니
왜 ‘다시’라고 할까? 어제도 성전에 오셨다는 의미다. 앞 장을 보면 성전에서 겪은 일이 나온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잡으려는 일이 있었다. 예수님에게 성전은 편안한 장소가 아니었다. ‘다시’라는 말에 예수님의 각오가 엿보인다. 지난밤 감람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시고, 그의 뜻을 구했기에 말씀 적용으로 성전에 돌아오셨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 성전은 어떤 곳일까?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성전에 제사하기 위해 간다거나 성도들이 주일에 가는 교회의 개념으로 성전에 가시지 않았다. 예수님에게 성전은 사역 장소이고 삶의 터전이었다. 예수님은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기 위해서 오셨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모인 성전으로 가셔서 그 일을 행하셨다. 만약 예수님이 성전에 다시 가시는 적용을 우리도 하려면, 교회가 아니라 삶의 현장으로 가야 한다.
예를 들자면 나를 미워하는 상사가 있는 직장으로 가야하고, 가기 싫은 시댁에 가야 한다. 시댁 제사에 무조건 가지 않는 것은 좋은 적용이 아니다. 가야 될 때가 있고 또 가지 말아야 될 때가 있다. 믿지 않는 시댁 식구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가는 것이 적용이다. 더 일찍 가서 섬기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직장에서 술 먹는 자리에 가지 않는 것이 적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실 술을 마시느냐 안 마시느냐는 그 자리에서 결정되는 일이 아니다. 분위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술을 마셨다는 사람은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평소 그의 삶 때문에 그 자리에서 예수 믿기에 마실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제대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아왔다면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힐 수 있다.
정죄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성전에서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다. 간음 현장에서 한 여인을 붙잡아 와서 예수님 앞에 세우고 어떻게 할지를 묻는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악한 계략에 걸릴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현행범일 경우에는 모세 율법에는 돌로 쳐 죽여야 하지만, 예수님은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셨다.
난감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즉답 대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 ‘무엇을 쓰셨나?’ 어리석은 질문이다. ‘왜 쓰셨나?’ 좋은 질문이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무리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예수님도 잠시 생각할 시간을 위해서일까.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셨다. 그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계신다.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피해 주심으로 생각할 시간을 주고 그들의 양심을 일깨워 주셨다.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무리들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돌아갔다.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니 나도 저 여인보다 나은 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 들었던 돌을 내려놓게 된다. 미움과 증오의 돌멩이들이 내 마음에서 하나둘 제거되기 시작한다. 내 죄가 보이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의 허물이 보이지 않게 된다. 내 눈에 들보를 뺄 수 있으면 좋겠다.
죄가 드러나는 은혜
이제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제야 얼굴을 들어 주변을 살피니 한 사람도 없음을 여인도 알게 된다.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정죄하는 분이 아니다. 우리 대신 정죄를 당하신 분이다. 누군가를 정죄하는 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 여인은 간음 현장에서 붙잡혔다. 운 나쁘게 걸려서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겪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생각을 뒤집어 보자. 만일 현장에서 들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현장에서 붙잡혀 죄가 드러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죄가 드러나는 것이 은혜다. 죄를 짓고도 드러나지 않는 것을 은혜라고 하면 안 된다. 아프고 힘들지만 죄를 드러내면 죄는 세력을 잃는다. 죄를 숨겨 두면 내 속에서 자란다. 죄의 종노릇하게 된다. 여인이 간음 현장에서 잡힌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큐티는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 우리 자신을 적나라하게 비추어서 우리의 부족한 면들, 우리의 죄 된 면들을 다 들추어내는 것이다. 그래야만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십자가가 필요하고 그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나는 100% 죄인이고, 너무 추하고 더러워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구나, 이걸 뼈저리게 느낀 자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감격한 삶을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