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러코스트 같은 이민 유학생활

강권적으로 시작하게 하신 비즈니스
장기사업비자가 안되면 어떡하지 하면서 연일 걱정만 하고 긍정적이지 못한 생각을 가진 후배 덕(?)에 뜻하지 않게 보습학원을 운영하기에 이른 나는 이미 준비하여 온 랑기토토 칼리지 후문 쪽 학원 부지에서 운영을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어차피 진행은 해야 하는 학원 사업이고 그 당시 우리 유학원을 통하여 조기유학 와서 공부하던 학생들도 제법 있었기에 기왕이면 제대로 교육하고 유학생 관리에도 체계적이겠다 싶어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출장 가서 학원가를 둘러보고 사립대학들도 방문하면서 학원 운영에 대한 조언을 듣고 아이디어도 얻었다.

미국 내에서의 다양한 조기유학 운영 방식이나 교육 플랫폼을 보고 와서 학원 운영에 도입한 것들이 있는데 그 당시 노스쇼어에는 두 곳 정도 교민이 운영하는 규모가 있는 학원들이 있었다.


대부분 학교 일정에 따라 학원을 운영하고 방학 기간에는 같이 방학하는 추세였던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나는 미국 유명학원의 특별한 프로그램들을 벤치마킹하여 그 당시 뉴질랜드에서는 아무도 시행하지 않았던 수업 전 단어시험 및 방학특강, 전문교사가 직접 강의하는 공인 시험 준비 과정 등을 만들어 가며 한인회장배 영어수학 경시대회를 개최하기까지 뉴질랜드 교민 보습학원의 획을 그을 만한 교육 프로그램들을 남겼다. 이 일로 한국의 스포츠서울 선정 2004년 뉴질랜드 유학기업 대상도 받게 되었다.

자녀의 교육까지 계획하셨던 하나님
우리 가족과 자녀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는 여기서 또 한 번 역사하였다. 전혀 기대하고 한 것이 아닌 데도 이 학원 운영은 나의 두 자녀의 대학 진학과 평생의 진로를 결정짓는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두 딸은 머레이스 베이 인터와 랑기토토칼리지를 다녔기 때문에 방과 후 학원으로 걸어와서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 동참하게 하였다.


그 당시 두 딸은 나에게 많은 컴플레인을 하였다. “아빠는 왜 학원을 하서 우리는 무슨 죄로 학원 수업 대부분을 출석해야 하냐?”는 등 방과 후 좀 놀거나 쉬어야 하는 기본권을 박탈당했다며 항의하기도 했다.

또한 명색이 학원장 딸인데 공부를 소홀히 하면 아빠 망신, 본인 망신이라 여겨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고 나에게 토로하는데 애틋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그 시절 학교 끝나고 학원 와서 단어 시험보고 공부한 습관이 결국 한국에서의 엄청난 공부량과 시험, 그리고 치열한 경쟁이 이어지는 의과대학 생활을 힘은 들었지만 견뎌내고 정해진 기간 내에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전공의 기간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거 같다는 말을 했다.


만약 내가 학원을 운영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 내외는 자녀들에게 그렇게 방과 후 공부를 절대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양육까지 책임져 주시려고 유학을 생각해 봤던 나에게 이민의 길을 열어 주시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학원 사업과 유학원 사업을 창업하고 운영하게끔 강권적으로 환경을 조성하시고 또 이 사업을 통하여 우리 가정에게 교육의 눈을 뜨게 하시고, 생각지도 못한 자녀들의 의대 진학을 위한 밑바탕이 되게끔 하여 주신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인도하심이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인생은 새옹지마
그러나 유학 이민생활은 일종의 광야 시대라고 봐야 할까? 이민 초창기 경제적으로 한번 흔들어 주셨던 주님께서 이민 10년 차를 지나자 이번에는 건강을 뒤흔드셨던 사건이 생겼다.

유학원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된 시점에 많은 유학생들의 부모님이 우리 가정에서 학생들을 맡아 주기를 원하여 아내는 다른 비즈니스는 그만두고 홈스테이를 본격적으로 하면서 케어기버 역할을 하였다. 몸이 건강한 편은 아니었으나 특별히 어디가 아픈 상황은 아니었고 다른 일로 가정의를 만나서 상담을 받던 중 혜가 갑자기 올해 마흔이 되었으니 정기검진해 보자며 암 검사를 의뢰하여 주었다.


이에 아내는 흔쾌히 검사를 받고 집에 왔는데 일주일이 지나 갑자기 GP가 만나자고 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여 살짝 걱정은 되었지만 아내나 우리 집안에 암 이력을 갖고 있는 분들이 없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고 GP를 만났는데 암이 의심되니 조직검사를 해보자고 하였다.

둘이 너무 놀라 할 말을 잃고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조직검사 예약을 하고 집에 왔다. 한국과 달리 뉴질랜드는 이런 검사가 바로바로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서 또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고, 조직검사 후 결과를 보는데도 또 1~2주일 그야말로 암흑 같은 한 달의 시간이 지났을까? 최종 진단은 암이었다.

그러면서 젊으니까 암세포가 금방 확산되고 전이될 수 있으니 신속히 수술 일정을 잡아 주겠다고 하여 2주도 안 되어 노스쇼어 병원에 수술 일정이 잡혔다. 병원 입원과 수술에 대한 설명, 그리고 수술 후 이어질 화학치료, 방사선치료, 항암제 복용, 수술의 성공 여부, 재발 확률에 대한 안내 등 나이 40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 상황과 향후 치료 계획을 들으며 우리 부부는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진행하여야 했다.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
물론 나는 그때도 새벽기도를 다니던 터라 청천벽력 같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아내에게 어떻게 위로의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암 치료는 쉽지 않지만 사실 20여 년 전만해도 표적 치료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암 선고를 받으면 수술을 하더라도 재발의 위험 등 희망을 갖기 쉽지 않은 어려운 병이라 그것도 마흔이라는 젊은 나이에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오직 주님께 이 상황을 알리고 수술과 치료가 잘되고 5년 동안 항암제를 먹으며 재발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여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2004년 7월 1일 둘째 딸 생일날 수술실에 들어가는 엄마를 보며 왜 하필이면 자기 생일날 수술해서 생일 파티도 못 하게 하냐고 투덜거리는 딸들을 뒤로하고 나와 아내는 목사님과 많은 성도들의 기도를 받으며 수술장으로 들어섰다.


두 차례에 걸친 암 절제술에 6개월 동안 머리가 다 빠지는 화학치료, 그리고 해를 넘겨 몸의 많은 세포를 제거하는 방사선 치료 등등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뎠을까 할 정도로 어려운 기간이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대신 아파주고 대신 수술을 받고 싶을 정도로 낙심한 아내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아내를 위하여는 기도 외에는 달리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도 돌이켜 보면 GP의 암 검사 권유로 암을 조기 발견할 수 있었고, 주변 분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강권적인 주관하심으로 속전속결 진행된 수술과 치료 일정이 다행히 힘든 고비와 지금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은혜라고 생각된다.

근묵자흑 근주자적
이렇게 암 수술과 항암 치료를 위하여 병원을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같은 진단을 받고 수술과 치료를 받았거나 받고 있는 한국인 환자들의 모임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 모임만 다녀오면 너무 낙심한 상태로 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그 모임에서는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물어보니 “뭐 먹지마라 뭐 먹지마라 하는데 그대로 안 먹으면 거의 굶어서 더 병날 것 같고 누구는 암이 재발했다”라는 소리만 듣고 온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도 재발할 거라는 운명론에 절망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그 모임은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투병 중에도 가발을 쓴 채로 신앙적인 일대일 제자양육 프로그램 등을 이수하며 하나님 긍휼하심과 긍정적인 사람들과 함께 은혜와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그 어려웠던 시간을 은혜로 잘 극복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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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성길
연세대학교 졸업, 뉴질랜드 광림교회, 우리엔젯유학원 대표원장 / 대학진학 컨설턴트 / 교육칼럼니스트. 20여 년간 유학원을 운영하며 두 자녀를 모두 의과대학에 보내어 의사로 성장시키며 신앙과 교육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한 에피소드를 연재한다.